국회가 대통령의 위헌ㆍ불법 계엄을 해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거리의 분노가 필요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해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시 2차계엄을 선포하겠다는 발상이 고개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2차계엄은 1차 불법 계엄보다 훨씬 더 불법하다. 이유는 1차계엄이 헌법과 법률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2차계엄은 그 도전을 견제하고 교정하라는 헌법의 안전장치마저 무력화하려 드는 ‘통제의 통제’를 겨냥한 공격이기 때문이다.권력의 오만은 처음엔 법을 건드리고, 다음엔 법의 심
글로벌사우스는 단순한 지리개념이 아니라 냉전기 제3세계나 비동맹 전통에서 이어진 정치ㆍ경제적 자기호명에 가깝고 식민지 경험, 자원의존형 경제구조, 국제규범설계에서의 비주류화 같은 공통의 역사적 조건이 배경에 깔려 있으며, 주체적으로 성장경로를 설계하려는 의지가 이름에 들어 있다. 단지 지구본 남쪽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질서에서 주변으로 취급돼 온 다수의 국가와 시민이 겪어 온 비대칭을 드러내는 언어라고 보아야 한다.최근 글로벌사우스가 힘을 얻고 있다. 미ㆍ중 경쟁이 격해질수록 많은 국가는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공상과학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부터 자율주행차, 의료진단 보조시스템에 이르기까지 AI는 이미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상식을 재정의하고 있다.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서 우리는 AI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AI를 맹신하거나 무조건 배척하는 극단적 태도가 아닌, AI를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강력한 도구’로 인식하고, 인간중심의 윤리적이고 균형 잡힌 관점을 견지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가장 먼저
주식시장이 달아오를 때마다 우리는 같은 풍경을 목격한다.레버리지의 유혹이 시장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빚내서 투자”라는 말이 어느새 상식처럼 회자된다. 이른바 빚투는 한편으로 개인의 합리적 선택처럼 보인다. 낮은 금리, 빠르게 올라가는 자산가격, 미래소득에 대한 자신감이 결합하면, 타인의 돈을 빌려 수익을 키우려는 시도는 경제학 교과서의 레버리지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그러나 문제는 이 행위가 개인의 재무구조와 사회적 안전망, 시장의 안정성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빚투의 문제는 단
정보는 넘치고 신뢰는 부족하다. 이 한 문장은 현대사회가 겪는 가장 뿌리 깊은 딜레마를 정교하게 표현한다. 인터넷과 모바일의 보급, 그리고 이제는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까지 정보생산과 전달의 장벽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누구나 손쉽게 글을 쓰고, 사진과 영상을 만들고, 한순간에 전 세계로 퍼뜨릴 수 있다.한때 ‘정보는 힘’이라 여겨졌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정보자체가 더 이상 희귀한 자원이 아니다. 오히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라야 할지 혼란만 커진다.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진실에
우리 사회에서 ‘정의’와 ‘공정’은 늘 뜨거운 담론의 중심에 있다. 이 두 단어는 정치적 색깔을 막론하고 모두가 외치는 가치지만, 정작 그 구체적 의미와 실천 양상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스펙트럼 위에서 전혀 다르게 만개한다.표면적으로는 모두가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질서’를 말하지만, 그들이 꿈꾸는 정의와 공정의 모습, 그리고 실현경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는 때로 서로의 신념 안에서 모순처럼 보이기도 하며, 현실정치에서는 논란과 충돌의 씨앗이 되곤 한다.진보의 시선에서 정의
형사사법시스템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싸늘하다. 그 중심에는 ‘선택적 정의’라는 비판을 받는 검찰의 행태가 있다. 공정한 법 집행을 생명으로 해야 할 검찰이 특정사건에서는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두르지만, 다른 사건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모습을 보일 때 국민들은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특히 ‘선택적 기소’를 넘어 ‘선택적 항소’까지 서슴지 않는 행태는 “범죄자보다 더하다”는 격한 비판에 직면하게 한다. 과연 이 고질적인 문제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검찰의 기소편의
도시계획 및 경관조성은 도시를 형성하는 중요한 정책으로 단순한 물리적 배치를 넘어선다. 이는 도시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핵심요소이다.과거 양적 성장에 매몰되었던 도시개발 패러다임은 이제 질적 성장과 심미적 가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세계유산과 같은 소중한 자산을 보호하는 정책은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도시의 무분별한 팽창은 필연적으로 역사문화적 자산을 위협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국가적
“검사는 사건 수사에서 범죄를 배운다” 이 문장은 풍자일까, 경고일까. 나는 이것이 한국 사법의 권력구조가 낳은 오래된 진실을 드러내는 경고라고 본다.수사와 기소, 공소유지까지 권한을 한 손에 쥔 조직은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어떻게 혐의를 만들고 입증할지’에 관한 기술과 패턴을 누구보다 빠르게 축적한다. 문제는 그 기술이 공익과 인권을 향할 때는 전문성이 되지만, 통제와 투명성 없이 권력과 결합하면 위험으로 변한다는 점이다.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목격한 것은 후자에 가까웠다.
포털의 주식카페는 한때 개인투자자들의 학교였다. 공시를 읽는 법, 재무제표를 해석하는 요령, 업계 흐름을 따라가는 감각을 익히는 데는 카페가 훌륭한 교실이자 도서관이었다. 게시판에는 다양한 관점이 격돌했고, 토론기록이 아카이브처럼 쌓였다.시간이 지나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고 메신저가 생활의 인프라가 되자, 투자 커뮤니티의 무게중심은 점차 카페의 공개토론에서 메신저 기반의 폐쇄형 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바로 ‘리딩방’의 부상이다. 이 변화는 단절이라기보다 분화에 가깝다. 카페가 아이디어와 학습, 아카이브
문명이 무너지는 방식은 종종 조용하다. 질서가 무너지기 전에 먼저 예측가능성이 희미해지고, 책임의 경계가 흐려지며, 제도가 사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물리학에서 출발한 엔트로피의 개념은 바로 그 무질서의 일방향 흐름을 가리킨다.제레미 리프킨이 산업문명의 구조적 한계를 엔트로피로 설파했다면, 오늘 우리의 전장은 사이버공간이다. 필자가 명명한 ‘사이버엔트로피’는 디지털문명에서 법질서가 겪는 무질서의 상승을 정면으로 조명한다. 그리고 사이버형법학은 이 개념을 공허한 은유가 아니라,
우리는 세계를 묘사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무엇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지는 잘 설명하지 못한다. 데이터와 지표는 넘치지만, 그 숫자들이 어떤 삶을 정당화해야 하는지, 어떤 제도와 습관으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공통의 언어는 희미하다.전승화 철학은 단순한 관념을 넘어, 필요한 정신문화의 이름이다. 전승화는 세계를 분절된 부품의 합으로 보지 않고, 상호의존하는 전체로 파악하며, 협력의 증폭을 통해 총합을 키우고 차이를 조율하여 조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이것은 고전 언어로 보이지만 실
암호화폐의 세계에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 중심에 선 스테이블코인은 기존의 변동성 높은 암호화폐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한 새로운 금융기술이다. 달러와 같은 법정화폐나 금과 연동되어 가격 안정성을 확보한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과 같은 전통적인 암호화폐가 실질적인 결제·송금 수단이 되기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하며 세계 금융환경에 신선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금융시장에 미친 첫 번째 충격은 국제 결제ㆍ송금의 혁신이다. 지금까지 국가 간 자금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 중국을 둘러싼 논란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한한령, 사드사태, 코로나19, 동북공정, 그리고 각종 문화경제적 갈등까지 중국 관련 이슈가 터질 때마다 ‘반중’과 ‘혐중’이라는 단어가 인터넷과 언론을 가득 채운다.그러나 이 두 용어의 차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명확하지 않다. 때론 혼동되어 정당한 비판이 혐오로 오해되거나, 혐오가 비판인 것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이 경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비판 문화는 건강함을 잃고, 사회는 불필요한 분열과 갈등에 빠질
리베이트는 오늘날 기업과 시장, 그리고 다양한 산업현장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단어다. 원래의 의미는 거래상대방에게 일정한 조건 달성 시 금전이나 혜택을 돌려주는 ‘환급’ 내지 ‘사후할인’에서 출발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호 간의 합의와 계약에 따라 이루어지는 정당한 경제활동처럼 보인다.그러나 리베이트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제공되느냐에 따라 그것은 순식간에 불법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리베이트의 본질과 그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대해 우리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기업 간 거래현장에서는 리베이트가 일종의
우리는 더 이상 공기와 물, 토양과 생태계만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살지 않는다. 우리의 주의와 감정, 판단과 선택은 네트워크와 플랫폼,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편집된 흐름 속에서 일상적으로 형성된다. 이 연결된 층위가 바로 사이버 환경이다.그럼에도 헌법 제35조의 환경권이 이러한 환경을 자동으로 포섭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환경권은 제정ㆍ운영의 역사 속에서 대기ㆍ수질ㆍ토양ㆍ소음ㆍ악취 등 물리적 매질을 중심으로 구체화 되었고, 판례와 학설 또한 주로 자연ㆍ생활환경 사안을 무대로 발전해 왔다.
[로리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는 지난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에 대해 “해괴한 기각 사유”라며 “위법성 인식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판단은 단순한 영장기각을 넘어, 내란 행위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한 논리”라고 비판했다.[로리더 최창영 기자 ccy@lawleader.co.kr]
2025년 국회가 마침내 ‘근로자의 날’의 공식명칭을 ‘노동절’로 변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정은 수십 년간 유지돼 온 관행에 제동을 거는 상징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 변화가 단지 언어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한국 사회의 노동 인식과 법ㆍ제도 전반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와 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우리 사회에서 ‘근로’라는 말은 오랜 시간 익숙하게 쓰여 왔다. 1963년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래, ‘근로기준법’, ‘근로복지
알 권리(정보접근권),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일반적 행동의 자유, 익명표현의 자유, 의료 자기결정권(연명의료 포함), 양심적 병역거부 등 우리 삶을 좌우하는 많은 기본적 권리들은 헌법 조문 어딜 펼쳐도 그 규정이 보이지 않는다.그럼에도 우리는 이 권리들 덕분에 국가의 정보독점을 견제하고, 내 데이터와 신체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며, 실명 강제 없이 의견을 표명하고, 행정과 형벌권 앞에서 절차적 존중을 요구해 왔다.문제는 이처럼 핵심적인 권리들이 판례와 ‘헌법정신’에 기대어 유지되는 구조가 성문법주의의 예
뉴스에 뜨는 여론조사 숫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여론조사검증위원회’를 만들어 기준 미달 조사는 아예 발표 못 하게 하자고 말한다. 겉보기에 깔끔해 보이지만 쉽지 않은 조치다. 그 대신 더 넓게, 더 밝게 공개하고, 틀리면 더 빨리 고치게 하면 된다. 정보는 이를 가리는 순간 오해를 낳고 드러내는 순간 스스로 정화되는 힘을 가진다.허가제는 문제를 키울 소지가 크다. 발표 전에 공공기구의 허락을 받게 하면 사전검열 논란이 생긴다. 속보성도 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