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사우스는 단순한 지리개념이 아니다>
글로벌사우스는 단순한 지리개념이 아니라 냉전기 제3세계나 비동맹 전통에서 이어진 정치ㆍ경제적 자기호명에 가깝고 식민지 경험, 자원의존형 경제구조, 국제규범설계에서의 비주류화 같은 공통의 역사적 조건이 배경에 깔려 있으며, 주체적으로 성장경로를 설계하려는 의지가 이름에 들어 있다. 단지 지구본 남쪽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질서에서 주변으로 취급돼 온 다수의 국가와 시민이 겪어 온 비대칭을 드러내는 언어라고 보아야 한다.
최근 글로벌사우스가 힘을 얻고 있다. 미ㆍ중 경쟁이 격해질수록 많은 국가는 진영선택 대신 실용을 택한다. 안보는 한쪽과 협력하면서 무역과 에너지는 다른 쪽과 묶는 다층전략이 일상이 됐고, 여기에 팬데믹과 공급망 충격, 기후위기와 식량ㆍ부채위기가 겹치며 글로벌사우스의 요구가 국제의제가 되었고, 백신접근, 부채구조조정, 기후재원, 공정한 광물·에너지전환 문제는 더 이상 원조 대상이 아니라 지구적 안정의 전제조건이 됐다.
경제적으로 글로벌사우스는 세계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청년인구가 두텁다. 내수 성장 잠재력과 도시화 속도가 빠르며, 제조ㆍ서비스의 가치사슬이 재편될수록 생산과 소비의 새 축이 이 지역에 생긴다.
인도네시아의 니켈정책이 배터리산업 지도를 흔들고, 베트남과 멕시코가 ‘프렌드 쇼어링’의 수혜를 받는 동안 아프리카대륙 자유무역지대는 단일시장을 향한 장기인프라를 깔고 있다.
인도의 디지털 공공인프라가 소액결제를 혁신했고, 케냐의 모바일머니가 금융포용의 교과서가 됐다. 이는 따라잡기가 아니라 제도와 기술을 현지맥락에 맞게 조립해 새로운 표준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으로는 규범경쟁의 무대가 넓어졌다. 데이터주권, 플랫폼규제, 인공지능거버넌스, 원격근로와 이주노동 권리 같은 새로운 문제는 선진국 해법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기후협상에서 손실과 피해에 대한 재원, 에너지전환의 공정성, 탄소국경조정의 부작용 완화 등은 글로벌사우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다.
브라질이 아마존을 보전하는 대가로 금융과 기술협력을 요구하고, 아프리카연합이 G20 정회원으로 들어와 발언권을 넓히는 장면은 상징 이상이다. 국제금융질서에서도 신개발은행과 지역개발은행의 역할이 커지고, SDR 재배분과 채무 재조정의 새 원칙이 논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로벌사우스는 거칠고 이질적이다. 부국과 빈국, 자원수출국과 제조국,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한데 묶인다. 그래서 글로벌사우스를 하나의 블록으로 단순화하면 현실을 놓친다. 공통분모는 불평등한 규칙과 대리설계에 대한 피로, 그리고 정책공간을 지키려는 열망이다.
각국이 선택하는 전략은 다르지만, 기술이전과 공동연구, 가치사슬내 상향이동, 데이터와 표준의 공동설계에서 이해가 일치한다. 남남협력은 선언보다 실무가 중요하고, 표준과 인증, 결제와 물류 같은 ‘지루한 인프라’를 공유할 때 힘을 갖는다.
위험도 분명하다. 글로벌사우스의 이름으로 내부의 불평등과 권리침해가 정당화돼선 안 된다. 청년ㆍ여성ㆍ이주노동자ㆍ비공식 부문이 배제되면 성장 과실이 축소된다. 채무와 환율충격, 식량ㆍ물ㆍ보건의 취약성, 기후재난 빈도가 높아지는 현실은 거칠게 성장을 밀어붙이는 전략의 비용을 키운다.
산업정책이 재도약 발판이 될 수 있지만, 투명성과 경쟁촉진, 역량축적 없이 보조금만 확대되면 정치경제적 포획이 따라온다. 북대남의 이분법에 갇혀 대화와 타협의 공간을 닫는 태도 역시 장기적으로 손해다.
그렇다면 왜 중요한가. 기후위기의 해법은 글로벌사우스의 에너지전환속도와 품질에 달려 있고, 팬데믹 이후의 보건안보는 남반구의 제조ㆍ콜드체인ㆍ진단역량 확충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
원자재와 핵심광물의 안정적 공급, 농업생산성과 식품시스템의 회복력, 디지털시장의 다음 10억 사용자도 이 지역에서 나온다. 국제규범을 설계하는 테이블에서 이들 동의 없이 지속가능한 합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단순한 원조나 판매시장으로 보는 관성에서 벗어나 공동설계와 공동투자, 위험분담과 성과공유라는 프레임으로 옮겨가야 한다.
요컨대 글로벌사우스는 새로운 진영의 이름이 아니라 다극적 세계에서 규칙과 역량을 함께 만들자는 초대장에 가깝다. 필요한 것은 경청과 반복가능한 협력모델, 그리고 상호존중에 기반한 기술ㆍ자본ㆍ지식의 순환이다. 표준을 함께 쓰고 데이터를 함께 관리하며, 인재와 아이디어가 왕복하는 통로를 넓히면, 남과 북 모두 더 안전하고 풍요로운 결과를 얻는다.
세계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흐름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 흐름을 두려워하기보다 함께 방향을 정하는 편이 낫다. 글로벌사우스의 의미와 중요성은 바로 그 선택의 가능성에 있는 것이다.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