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계엄보다 훨씬 더 불법한 2차계엄>
국회가 대통령의 위헌ㆍ불법 계엄을 해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거리의 분노가 필요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해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시 2차계엄을 선포하겠다는 발상이 고개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2차계엄은 1차 불법 계엄보다 훨씬 더 불법하다. 이유는 1차계엄이 헌법과 법률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2차계엄은 그 도전을 견제하고 교정하라는 헌법의 안전장치마저 무력화하려 드는 ‘통제의 통제’를 겨냥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오만은 처음엔 법을 건드리고, 다음엔 법의 심판자를 건드린다. 2차계엄은 그 두 번째인 것이다.
계엄은 전시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예외적 수단으로 설계됐다. 예외는 최소화될 때만 정당하다. 그래서 헌법은 국회의 해제권한을 규정했다. 군이 시민 위에 올라탈 위험을 견제하는 마지막 방파제다. 국회가 해제를 의결했다는 것은 계엄의 정당사유가 무너졌음을 혹은 절차와 비례가 파탄났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 결론에 반발해 즉각 재선포를 강행한다면 그것은 사태의 변화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 판단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비상권한 남용에서 통제회피로의 전환, 바로 그 지점이 2차계엄의 본질적 위법성을 구성한다.
2차계엄은 형식상 새 문서와 도장으로 포장된다. 국무회의를 다시 열고, 보고와 통보절차를 밟는 시늉도 가능하다. 하지만 법은 형식의 재탕으로 속지 않는다. 동일한 사실관계 위에서 같은 강도를 되풀이한다면 그건 재선포가 아니라 지속이다.
더구나 국회가 막 해제를 의결한 시점이라면 권력분립 관점에서 대통령은 정치적ㆍ법적 경고를 받은 셈이다. 그 경고 바로 뒤에 같은 조치를 반복하는 행위는 통치행위의 영역이 아니라 권력담금질 영역으로 떨어진다. 헌정 질서에서 금지되는 것은 단지 쿠데타 같은 극단만이 아니다. 의회통제를 우회하는 반복과 집요함도 충분히 위헌의 자격을 갖춘다.
2차계엄을 정당화하려면 첫째, 국회 해제 이후에 발생한 중대한 새로운 사실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그 사실이 다른 모든 수단을 제치고 계엄만이 유일하고 비례적 수단임을 증명해야 한다. 셋째, 기간과 범위를 앞선 계엄보다 좁히고 억제해야 한다. 넷째, 국회의 심의와 감시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정당화의 문은 닫힌다. 현실에서 이 네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2차계엄은 첫 계엄의 실패를 덮기 위한 정치적 방어막으로 작동하기 쉽다. 실패 이유가 취약한 정보와 과장된 위협평가에 있었다면 재선포는 그 취약성을 두 배로 연장한다. 권력은 판단을 수정하는 대신 더 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길을 택한다. 그 순간 법의 언어는 설득에서 강요로 변한다.
역사는 이런 반복을 관대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성숙할수록 국가긴급권 문턱은 높아지고 사법심사의 촘촘함은 커졌다. 한때 통치행위라며 건너뛰던 영역에도 이제는 비례와 필요최소침해의 잣대가 들어간다. 국회가 해제해 놓은 바로 그 자리에 다시 계엄을 얹는다면, 사법의 질문은 더 날카로워진다.
무엇이 새로웠는가, 왜 지금인가, 왜 다른 수단이 아닌가, 왜 범위는 줄지 않았는가. 이에 답하지 못하면 남는 것은 불법의 누적뿐이다. 불법의 누적은 단순가중이 아니다. 헌법의 신뢰를 깎아내리고, 시민의 준법의식을 잠식하며, 군과 행정조직을 정치 전선으로 끌어들인다. 이 손상은 숫자로 계산되지 않지만, 회복에는 세대가 걸린다.
2차계엄의 정치적 비용은 법적 위험보다 더 빠르게 현실이 된다. 의회는 다시 해제의결을 추진할 것이고, 탄핵과 해임건의, 국정조사와 특검요구가 뒤따를 것이다. 거리의 저항은 첫 번째보다 단단해지고, 국제사회는 민주주의 후퇴 신호로 해석한다. 시장은 불확실성에 가격을 매기고, 안보는 오히려 취약해진다. 계엄은 질서를 위해 존재하지만, 근거 없는 계엄은 혼란의 증폭제다. 통제의 명분으로 통제대상인 시민을 적으로 돌리면, 비상은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그 악순환의 입구가 바로 2차계엄이다.
혹자는 말한다. 새로운 위기가 닥쳤다면 국가가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지 않는가. 그러나 위기는 계엄을 자동호출하지 않는다. 법의 사다리는 단계적이다. 정보공개와 경보체계를 높이고, 경찰력과 민방위 자원을 조정하고, 행정명령과 예산투입을 선행해야 한다.
사법영역과 협력해 신속영장과 특별재판부 등 절차적 장치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무엇보다 국회와의 협치를 통해 비상입법을 마련하면 된다. 이 모든 단계가 무시되거나 요식으로 처리될 때만 계엄이 입에 오른다. 2차계엄은 그 모든 단계를 두 번 건너뛴 셈이 된다.
군의 입장에서도 2차계엄은 독이다. 군은 정치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의 수단이어야 한다. 국회가 해제를 의결했다는 사실은 군이 민간통치공간을 더 이상 점유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다. 그 직후 재선포에 군이 동원된다면 군조직은 정치적 책임의 방패로 오인 받는다.
신뢰는 떨어지고 장병들은 시민 앞에서 곤혹을 겪는다. 장기적으로는 문민통제의 정당성이 훼손되고, 군 전문성도 타격을 받는다. 진정한 안보는 시민의 동의에서 나오지 명령 반복에서 나오지 않는다.
결국 2차계엄이 겨냥하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권력의 체면이다. 첫 계엄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고집, 의회가 내린 판단을 견딜 수 없다는 조바심, 책임의 화살을 분산시키려는 기술적 계산이 뒤엉켜 나온 처방전이다.
그러나 법치의 세계에서 체면은 근거가 될 수 없고, 고집은 정당성이 될 수 없다. 권력은 틀릴 수 있고, 틀렸을 때 물러서는 힘이 바로 민주주의의 내구성이다. 국회의 해제의결은 그 물러섬을 제도화한 장치다. 그 장치를 무효로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내일은 언론과 사법, 그 다음은 선거가 차례를 기다릴 것이다.
불법계엄보다 더 불법한 2차계엄이라는 표현은 자극적이지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2차계엄은 법의 예외를 중첩해 예외의 통제마저 예외로 만들려는 시도다. 민주주의는 그런 중첩을 허락하지 않는다.
국회가 해제를 의결했다면 권력은 해제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태가 정말로 변했다면, 그 변화를 입증하고, 덜한 수단으로 더 짧고 더 좁고 더 투명하게 대응하면 된다. 그조차 불가능하다면 필요한 것은 계엄이 아니라 교체다. 법이 남긴 마지막 문장을 무시하는 순간, 권력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파기한다.
2차계엄은 그래서 더 불법이다. 민주주의를 압박하는 힘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 힘이 마지막 선을 넘게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시민과 제도의 책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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