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완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혐중 시위, 법ㆍ윤리적 한계 넘어>

혐오를 외치는 확성기는 ‘자유’라는 이름을 빌린다. 일부 ‘혐중’ 시위가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헌법이 보장한 자유는 무제한적 권리가 아니다.

헌법 제21조는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타인의 명예ㆍ권리, 공중도덕과 사회질서를 침해하지 말라고 명시한다. 국제인권규범 역시 집단에 대한 증오와 폭력 선동을 금지한다. 정책ㆍ행위를 겨냥한 비판은 보호되지만, “중국인 일반”을 대상으로 한 낙인과 선동은 자유의 보호막 밖이다. 문제는 지금 거리에서 울리는 일부 구호가 법ㆍ윤리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혐중 시위는 법 위반행위이다. 집시법은 사전신고, 시간ㆍ장소ㆍ소음 기준을 정하고, 병원ㆍ학교ㆍ주거 인근의 평온을 보호한다. 확성기 소음이 기준을 초과하고 통행로를 불법 점거하며, 상가영업과 학교수업을 방해하면 해산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도로교통법은 긴급통행을 막는 행렬을 제재하고, 소음·진동관리법은 공공장소의 과도한 소음을 규제한다. 특정집단을 모욕하거나 허위사실로 명예를 훼손하면 형법상 책임이 뒤따른다. 주최자는 관리의무를 면할 수 없고 온라인 확산은 정보통신망법 문제도 발생한다.

혐중 시위는 법 위반을 논하기 전에 윤리가 훼손된다. 혐오 시위의 언어가 정체성을 표적으로 삼으면 비인간화의 장치가 된다. 외모ㆍ이름ㆍ억양이 죄의 증거로 작동하면, 타깃이 되는 건 중국 정부가 아니라 우리 곁의 이웃이다. 아동ㆍ청소년이 이 언어에 노출되면 편견이 사회화되고, 공동체의 신뢰는 사라진다. 윤리란 “무고한 제3자에게 불필요한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인데, 혐오 시위는 이 원칙을 위반한다.

국제적 파급효과는 악순환을 낳는다. 외부의 혐오는 상대국 강경파의 연료가 된다. 혐오 구호는 내부결집 명분으로 재활용되고, 민간교류는 위축된다. 거리의 분노가 당장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할지는 몰라도 협상력과 선택지를 줄이게 된다.

필요한 것은 자유의 틀 안에서 혐오를 억제하고 정책논의를 정밀화하는 규범의 재설계다. 공권력은 과잉금지 원칙을 지키되 폭력ㆍ차별선동ㆍ과대소음ㆍ통행방해에는 일관되게 개입해야 한다. 주최자는 메시지를 “정책ㆍ행위”로 한정하고, 집단 일반화와 비하를 배제해야 한다.

학교ㆍ직장ㆍ플랫폼은 혐오ㆍ괴롭힘 신고와 보호절차를 운영하고, 국가인권위원회와 지자체는 인권교육을 병행해야 한다. 언론과 시민은 출처검증, 맥락확인, 데이터의 정직사용을 통해 감정의 신속함이 진실을 압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론은 명료하다. 혐중 시위가 자유의 이름으로 혐오를 유통하는 순간, 법은 개입하고 윤리는 경고한다. 우리는 중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정체성의 낙인으로 변질되면 사회는 더 위험해진다.

자유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유를 남용하지 않는 것이다. 정체성이 아니라 행위를 판단하고 증거로 논증하며, 억제와 이익의 조합으로 정책을 설계하는 규범이 지켜질 때, 표현의 자유도 공공의 안전도 함께 지켜질 것이다.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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