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대한법률구조공단 피해자 국선변호사의 조력으로, 성범죄 발생 당시 술 취한 피해자가 단순 ‘알코올 블랙아웃’ 상태가 아닌 심신상실 상태라는 것을 밝혀내 성범죄 가해자에게 준강간죄가 인정됐다.
대한법률구조공단과 판결문에 따르면 2023년 5월 A씨(20대 여성)는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의 협력업체 대표 B씨(30대 남성) 등과 회식에 참석했다. 회식 후 A씨가 술에 취해 항거불능 상태가 되자, B씨는 A씨를 인근 모텔로 데려가 간음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A씨는 B씨와 헤어진 후 바로 남자친구에게 피해사실을 이야기하고, 산부인과에 방문해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 복용한 후 B씨를 고소했다.
이후 대한법률구조공단 소속 피해자 국선변호사의 법률 지원을 받게 됐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A씨와 면담을 통해 피해자의 입장이 재판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조력했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피해자 A씨가 당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였는지 여부였다.
B씨는 “당시 피해자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고, 피해자와 합의 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했다.
1심인 전주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김상곤 부장판사)는 2024년 10월 준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B씨에게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또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했다.
재판부는 “만일 피해자가 정상적인 의식 상태에서 피고인과 성관계를 하는 것에 동의했다면, 그런 사실을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이야기했을 것으로 보이지 않으므로, 피고인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A씨가 “피해자가 성관계 전에 ‘응’이라고 동의했다”는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당시 피해자가 술에 만취해 잠이 들어 제대로 의식을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피고인이 성행위 중 지속적으로 피해자에게 말을 걸어 대화를 유도한 것은 녹음을 통해 향후 성범죄 혐의를 피하거나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판단했다.
양형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인이 술에 취해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피해자를 간음한 것으로 범행 경위와 수법,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수사 과정과 재판 과정에서 보인 피고인의 태도 등에 비춰 죄질이 나쁘고, 비난 가능성도 크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이 사건 범행으로 심한 신체적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성적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며 “그럼에도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했고, 법정에 이르기까지 수긍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범행을 부인하는 바람에 피해자 등이 법정에 출석해 당시의 피해 경험을 다시 떠올려 진술하는 심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피고인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범행으로 인한 피해상황과 후유증을 호소하고, 피고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탄원하고 있는 사정을 종합해 볼 때 피고인의 책임이 무겁다”고 밝혔다.
◆ 피고인이 사죄하며 합의…항소심 재판부 ‘집행유예’로 감형
이후 B씨가 “원심의 형이 너무 무거워서 부당하다”며 항소했다. 그런데 B씨는 1심 재판 과정에서 보인 태도와는 달리 피해자 국선변호사를 통해 범행을 전부 인정하고, A씨와 합의를 원한다는 내용을 전해왔다.
B씨의 거듭된 사죄에 A씨는 숙고 끝에 합의했고, 판결에 반영돼 B씨는 감형을 받았다.
항소심인 광주고등법원 전주제1형사부(재판장 양진수 부장판사)는 최근 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B씨에게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것으로 20일 확인됐다. 80시간의 성폭력 치료강의 수강은 유지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술에 취해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피해자를 간음한 것으로, 범행 경위와 수법, 수사 과정과 원심 재판 과정에서 보인 태도 등에 비춰 죄질이 나쁘고 비난 가능성이 크다”며 “피해자는 피고인의 범행을 심한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커다란 성적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사건이 일어난 2023년 5월 이후로 약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사 및 재판이 진행되면서 정신적 고통을 받아, 피고인의 책임이 무겁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은 원심에서는 범행을 부인했으나, 당심에서 범행을 인정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해 처벌불원서를 제출한 점, 피고인은 원심 판결에서 법정 구속돼 8개월 동안 구금생할을 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성행을 개선하고 자숙하는 기회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점, 이전에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초범”이라며 “이번에 한해 징역형의 집행을 유예함으로써 사회에 속한 구성원으로 성실히 생활하며 자신의 삶을 개선할 기회를 줄 필요가 있어, 피고인의 양형 부당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 피해자 대리한 대한법률구조공단 원명안 변호사
한편, A씨를 대리해 소송을 진행한 대한법률구조공단 소속 원명안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음주 관련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상태를 보다 엄밀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판례”라며 “단순히 피해자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준강간죄 성립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법리가 적용됐다”고 평가했다.
원명안 변호사는 또한 “피해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피해자에 대해 최대한 범행사실을 입증할 수 있도록 자료 제출을 조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공단은 앞으로도 성범죄 피해자의 권리 보호와 법적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