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민 작가
신성민 작가

<누가 진짜 배신자인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

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해병대 1사단 7연대는 진압 명령을 받고 계엄군으로 시내로 투입됐다. 하지만 연대장 박구일 대령은 소속 장병들에게 위와 같이 명령했다. 그 결과 해병들은 시위대가 돌을 던지면 그대로 맞았고, 주먹으로 때려도 맞았다.

그 대신 싸리비를 들고 골목길을 청소하거나 묵묵히 도심 교통 정리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민들은 해병대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빵과 우유를 건네기도 했다. 이러한 신사적인 해병대의 임무 수행은 이후 ‘국민의 군대’라는 별명을 갖는 계기가 됐다.

나는 해병대 병 983기로 입대해 만기 전역했다. 훈련단에 있을 때 DI(교관)가 병기를 나눠주며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이 총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국민을 향해 사용할 일이 생기면 차라리 너희가 죽어라”

제대한 지 20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 말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거칠지만 충성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줬기 때문이다. 만일 부마항쟁 당시 해병대가 시민을 향해 발포하고, 완력으로 진압 작전을 펼쳤다면 우린 그 부대를 “충성스럽다”라고 평가했을까? 그렇게 하지 않은 해병대를 지금 ‘배신자’라 평가하는 사람이 있을까?

시계를 뒤로 돌려 16세기로 가보자.

중세 교회는 면죄부를 대량으로 판매하고, 성직을 매매하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 명백히 반(反) 성경적인 모습이다.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일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부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고 이 같은 행태를 강력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루터의 저항은 이후 종교개혁을 촉발했다. 그리고 새로운 개혁교회와 르네상스가 탄생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는 무지한 농민에게 면죄부를 떠넘기며, 고혈을 쥐어짜는 행태에 눈감지 않았다. 그런 루터가 교황청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았다고 우린 그를 ‘배신자’라 불러야 하나?

구약성경에는 ‘충성’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나온다. 히브리어로는 ‘아만’이다. 기독교에서 기도 끝에 붙이는 ‘아멘’과 어원이 같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신뢰, 진실, 성실함에 가깝다. 수직적 관계에서 무조건적 복종을 떠올리면 큰 오산이다.

지난 세월 권력자들은 충(忠)의 의미를 왜곡해 개인적인 복종의 뜻으로 슬그머니 치환해 놓았다. 자기 말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면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 즉 배신자로 몰아 손쉽게 처단하기 위해서다.

만일 동사무소 직원이 주민의 민원은 제쳐놓고, 승진을 담당하는 상사의 개인적 부탁이나 지시를 우선한다면 우리는 그를 “충성스럽다”,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가? 공무원이 사적 지시 대신 공적 업무를 우선 한다면 그도 ‘배신자’가 되어야 하는가?

루터 이후 등장한 개신교를 우리는 프로테스탄트(protetant)라고 부른다. 영어 뜻 그대로 풀이하면 ‘반대하는 사람’, ‘저항’'라는 의미다. 루터는 배신자가 아닌, 불의에 항거한 프로테스탄트였다.

마찬가지로 12.3. 불법 계엄을 온몸으로 막고, 국민에게 충실했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당연히 배신자가 아니다. 부마항쟁 당시 해병대가,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가, 국민의 요구를 우선하는 공무원이 배신자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공적 영역에 사적 관계를 끌어들이며 “인간적인 도리”를 운운하는 사람은 아직 부족주의적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이러한 어리석음과 무지가 망국적 세도정치와, 당파 싸움과, 족벌 정치를 낳았다.

민주-공화주의에서 공직자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뿐, 사사로운 인연을 우선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나라의 명운이 달린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개인적 연고에 무게 중심을 두어 판단하면 공동체는 와해된다.

대선 후보를 뽑기 위해 국민의힘 내부 경선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동훈을 제외한 다른 예비후보 중 한 사람이 계엄 선포 당시 당대표를 맡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어쩌면 ‘바나나 공화국’으로 전락하는 첫 단추를 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그에게 어설픈 배신자 프레임을 씌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를 배신자라 부르는 사람이야말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배신하는 진짜 역적이다.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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