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경찰이 정치인에 대한 수사상황을 언론에 흘린 것에 대해, 법원은 위법한 피의사실공표라고 판단해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 경찰의 위법한 피의사실공표에 대해 1심과 2심은 국가에 300만원의 위자료 판결을 했다.

수사기관(경찰, 검찰 등)의 피의사실공표 혐의로 기소된 사례가 없어 사실상 형법 제126조 피의사실공표죄가 사문화된 상황에서, 법원이 경찰의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위법한 관행에 제동을 거는 판결을 내려 의미가 크다.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 / 사진=패이스북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 / 사진=패이스북

◆ 경찰과 김재연 대표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1심과 2심 판결문 등을 종합하면 김재연 대표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2020년 6월 진보당 상임대표를 역임했고,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

그런데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계는 2023년 6월 8일 김재연 대표에게 ‘21대 국회의원 선거 관련 불법 정치자금 수수에 대한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에 관하여 문의할 사항이 있으니 2023년 6월 15일 출석하여 주기 바란다’고 기재된 출석요구서를 발송했다.

그런데 수사담당자는 2023년 6월 14일 조선일보 기자로부터 ‘민주노총 건설노조 정치자금법위반 사건 수사와 관련하여 최근에 김재연(전 진보당 상임대표)을 입건한 것이 맞는지’에 관한 전화 취재에 ‘맞다’는 답변을 했다.

조선일보는 2023년 6월 16일 “[단독] 김재연, 불법 정치자금 받은 혐의…총선 前 건설노조서 1000여만원”이라는 제목의 단독 기사에서 “김재연 전 대표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 건설노조로부터 1000여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경찰에 입건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기사에는 “서울경찰청 반부패ㆍ공공범죄수사대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김 전 대표를 수사 중이다. 조만간 김 전 대표를 소환 조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경찰은 김 전 의원 혐의를 뒷받침하는 관련자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라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후 “경찰, 건설노조 불법 후원금 김재연 전 진보당 대표 수사”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다.

당시에 대해 김재연 대표는 “아침 조선일보가 단독보도로 경찰이 불법후원금 수수 혐의로 저를 입건했다는 기사를 내보낸 후, 수십 개의 매체에서 유사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며 “저도 모르는 황당한 보도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입장을 밝혔으나, 언론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이미 ‘불법후원금을 받았다더라’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며 “지인들에게 걱정과 위로의 연락을 받으니, ‘속상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다.

김재연 대표는 “문제가 될 행위를 한 일이 없으니, 한차례 조사만 받으면 끝날 일로 여기며 출석 일정을 정해둔 상황이었다”며 “그런데 그 사이 언론을 통해 ‘부도덕한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버렸으니, 시간이 흘러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되거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해도 저의 실추된 명예를 보상받기 어렵다고 생각됐다”고 떠올렸다.

김재연 대표는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의 출처가 ‘경찰’이라고 확신해,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책임을 묻기로 생각하고, 오민애 변호사와 함승용 변호사를 선임했다.

하지만 김재연 대표는 형법상 피의사실공표 위반으로 기소된 사례가 없어, 민사소송을 통해 바로잡기로 했다. 이에 2023년 7월 경찰관의 사용자인 국가를 상대로 형법 피의사실공표 금지 위반에 따른 인격권 침해 등에 대해 3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김재연 대표는 “불법 정치후원금을 받은 바가 없고, 경찰이 합당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언론을 통해 피의사실을 공표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피의사실 공표죄가 존재함에도 위법 행위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수사기관이 갖고 있는 엄청난 권한을 견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에,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서라도 불법적인 피의사실 공표 관행을 중단시키고자 한다”고 소송 배경을 밝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 서울중앙지법 이준승 판사 “국가는 김재연에게 위자료 300만원 지급하라” 판결

1심인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1001단독 이준승 판사는 2024년 6월 13일 김재연 진보당 대표가 대한민국(법률상 대표자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는 원고가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위자료 3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준승 판사는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 A경정이 김재연에 대한 입건 사실을 조선일보 기자에게 전화로 확인해 준 사실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준승 판사는 “적어도 조선일보 기자에게 입건사실을 제공한 행위는 위법한 피의사실 공표로, 원고의 명예와 인권을 침해한 불법행위”라며 “원고가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위자료 300만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이번 소송을 대리한 함승용 변호사는 “피의사실공표죄로 기소된 사례가 없고, 경찰의 피의사실공표로 인해 무죄추정의 원칙이 사실상 의미를 잃은 상황에서, 법원이 수사기관의 위법한 관행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며 “매우 환영할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 항소심도 위자료 300만원 인정 판결

항소심인 서울중앙지방법원 제8-2민사부(재판장 김기현 부장판사)는 4월 18일 김재연 진보당 대표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의 항소를 기각한다”며 손해배상을 인정한 1심 판결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형법 피의사실공표죄 조항과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 조항을 살폈다.

형법 제126조(피의사실공표) 검찰, 경찰 그 밖에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알게 된 피의사실을 공소제기 전에 공표(公表)한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또한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 제4조에도 ‘사건관계인의 명예, 신용, 사생활의 비밀 등 인권을 보호하고 수사내용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사사건 등에 관하여 관련 법령과 규칙에 따라 공개가 허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의사실, 수사사항 등을 공개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규칙 제19조 제2항에는 ‘공보책임자가 아닌 수사업무 종사자는 전화나 그 밖의 방법으로 기자 등으로부터 수사사건 등의 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경우 “저는 그 사건에 대하여 답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으며, 공보책임자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는 취지로 답변해야 하며, 수사사건 등의 내용 일체에 대하여 언급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원 마크
법원 마크

재판부는 “경찰공무원인 A경정이 서울경찰청의 공보책임자도 아니면서 답변행위를 한 것은 형법과 규칙을 위반해 위법하게 피의사실(혐의사실)이나 수사상황을 공표하거나 공개한 것에 해당하고, 이로 인해 정당의 대표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앞으로의 국회의원 선거에도 입후보를 준비 중이던 원고의 명예와 신용을 훼손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국가는 “이 사건 답변행위는 공적 관심사인 정치인의 정치자금과 관련된 사안이고, 입건 여부에 대한 응답일 뿐 유죄를 속단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미 언론의 심층 취재가 이루어지고 언론에 노출된 상황이어서 위법성이 없거나 인과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언론의 사전 취재가 이루어졌다고 하여 피의사실 공표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고, 언론 보도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경찰이 피의사실을 공표하거나 입건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은 언론 보도에 대해 공적 신뢰를 부여하고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 되므로 더욱 신중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언론의 심층 취재나 보도와 수사기관의 공식적인 응답과는 성격이 다르고 정보의 신뢰도나 그 영향 정도에도 차이가 나는 점, 정당의 대표와 국회의원을 임했던 정치인으로 앞으로의 국회의원 선거에도 입후보를 준비 중이던 원고가 수사기관에 입건됐다는 사실 자체는 원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짚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 답변행위가 원고의 경찰 출석일 하루 전날에 이루어진 점, 경찰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거나 답변을 거부한다고 하여 경찰의 수사력에 의문이 제기되거나 경찰이 원고를 비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해 보면, 이 사건 답변행위가 위법성이 조각된다거나 원고의 명예훼손과 인과관계가 없다고 보기 어렵다”며 국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해배상 범위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의 수사과정에서 수사대상자의 명예, 신용, 사생활의 비밀 등 인권을 보호하고 수사내용과 수사상황의 보안을 유지해야 할 책무의 중요성, 이 사건 답변행위 이후 여러 언론에서 원고의 피의사실이나 수사상황과 관련한 보도들이 이어진 점, 원고의 정치인으로서의 경력과 이 사건 답변행위 당시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를 준비 중이었던

상황, 이 사건 답변행위와 추가적인 언론 보도로 인해 원고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상당한 비난에 직면함으로써 겪었을 정신적 고통의 정도 등 변론에 나타난 여러 사정을 참작하면, 피고가 배상해야 할 위자료액을 300만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고 판결했다.

◆ 김재연 “언론에 교묘히 정보 흘리고, 근거도 없이 여론재판으로 몰고 가는 마녀사냥식 수사 행태 사라져야”

항소심 판결에 대해 김재연 진보당 대표는 “경찰이 정치자금법 수사상황을 위법하게 언론에 공표한 행위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항소심 승소 판결을 받았다”며 “저의 명예와 신용을 훼손한 경찰의 불법행위에 대해 정신적 피해 보상을 판결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지연 대표는 “언론에 교묘히 정보를 흘리고, 근거도 없이 여론재판으로 몰고 가는 마녀사냥식 수사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며 “앞으로 다시는, 수사기관에 의한 인권침해로 고통받는 국민이 없어야 하겠다”고 강조했다.

◆ 함승용 변호사 “김재연 대표가 입은 명예와 신용 훼손이 회복돼야 하고, 위법한 수사 관행 반복돼선 안 돼”

이번 소송 대리를 맡은 함승용 변호사(법무법인 율립)는 “수사기관은 조사를 시작한 지 2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사를 종결하지 않고 있다”면서 “이번 판결을 통해, 김재연 대표가 정치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입은 명예와 신용의 훼손이 조속히 회복되어야 하고, 위법한 수사 관행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 경실련 시민입법위원장 정지웅 변호사 “피의사실공표 형사처벌 판례 나오길”

1심 손해배상 판결 당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시민입법위원장으로 활동하는 정지웅 변호사(법률사무소 정 대표변호사)는 “이번 손해배상 판결은, 법원이 우리 사회 정의 실현의 최후의 보루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 용기있는 판결로 평가하고 싶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지웅 변호사는 “앞으로는 형법상 피의사실공표죄 고소에 대해서 검찰이 불기소결정을 한다면, 피해자가 법원에 재정신청을 하고 법원의 공소제기명령을 통해서, 실제로 형사처벌되는 판례가 나오는 방향으로 진일보할 것을 기대해 본다”고 밝혔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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