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재벌 총수의 사법처리는 경영성과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재벌 총수의 사법처리 이후 기업경영은 안정적으로 유지됐으며, 설비투자는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재벌 지배주주의 사법처리가 기업의 투자결정을 위축시킨다는 재계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지난 1월 31일 ‘재벌 총수의 사법처리가 기업경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보고서(최한수 경북대 교수, 이창민 한양대 교수)를 발표했다.
연구소는 “재벌 총수의 사법처리가 기업경영과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오랜 논란의 대상이었다. 특히, ‘리더십 공백’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과 ‘규율 강화’로 인한 긍정적 효과라는 상반된 가설이 제기됐다”며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대규모 기업집단에서 총수의 형사처벌로 인한 경영 공백이 계열사의 수익성, 투자, 자본비용 등 주요 경영지표에 가져오는 변화를 실증적으로 검증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분석 대상은 2003년부터 2013년 사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재벌 총수 관련 기업들이었다. 횡령, 배임 등으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9개 기업집단(삼성, 현대차, SK, 한화, CJ 등)의 43개 상장 계열사 전체를 선정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동부그룹(DB) 김준기 회장, 두산그룹 박용성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CJ 이재현 회장,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한솔 조동만 회장, SK그룹 최태원 회장이다.
연구는 총수의 사법처리 사건 전후로 기업성과(수익성, 성장성, 자본비용, 설비투자 등) 및 경영활동의 변화를, 사법처리가 없을 때의 그것과 비교해 관찰했다.
분석 결과 재벌 총수의 형사처벌은 매출 성장률 등 핵심 경영 지표에 부정적 변화를 초래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이는 (재벌 총수) 사법처리 시작 전과 비교해 총수의 부재가 중단기적 경영 성과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유일한 예외는 설비투자였다. 대략 총수의 사법처리 이후에도 해당 기업집단의 계열사들은 그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회사들에 비해 설비투자비율이 4~7% 증가했다. (대체로 5% 유의수준)
보고서는 “(재벌 총수) 사법처리 이후 기업의 설비 투자율은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며 “이는 재벌 총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투자를 지속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 “‘재벌=국가 경제의 핵심 엔진’이라는 인식이 법적 처벌에 대한 관대한 평가”
보고서는 “총수에 대한 사법처리는 기업경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통념과 달리 유의미한 부정적 영향이 관찰되지 않았다”고 연구 결과를 분석했다.
보고서는 “한국의 재벌들은 지배주주에 대한 형사처벌이 확정된 시점에서조차 시장으로부터의 제재로부터 자유롭다. 자본 조달 비용이나 매출에 유의미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한국 재벌 그룹이 미국의 기업들과 달리 기업범죄 발생 이후에도 안정적인 자본 구조와 매출 성과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다시 말해 재벌 총수의 사법처리에도 불구하고 기업경영에 큰 영향이 없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재벌에 대한 시장 규율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봤다.
구체적으로 ‘경제적 독점력’을 꼽았다. 보고서는 “삼성전자(반도체), 현대자동차(차량) 등 재벌 계열사는 글로벌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차지한다. 소비자와 투자자는 대체재가 부재한 상황에서 재벌 제품ㆍ서비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재벌의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한다”고 밝혔다.
또한 ‘사회문화적 관용’도 짚었다. 보고서는 “‘재벌=국가 경제의 핵심 엔진’이라는 인식이 법적 처벌에 대한 관대한 평가로 이어진다”며 “재벌의 부정행위에 대해 총수의 경영권이 영향받지 않는 정도까지만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보고서는 “사법처리 이후 기업 경영에 부정적인 측면이 관측되지 않고 기업의 설비 투자율은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은, 재벌 총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매우 안정적으로 운영되며, 미래의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를 지속했음을 의미한다”며 “이러한 결과는 재벌 총수의 사법처리가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사회통념이 실질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이는 한국 재벌 기업들이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 등을 통해 총수 부재 상황에 효과
적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재벌 그룹 내 전문경영인 중심의 의사결정 체계가 정착됐는데, 이는 총수의 갑작스러운 부재 상황에서도 경영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총수의 형사처벌로 경영 참여가 제한된 시기에는 계열사들의 설비투자가 유의미하
게 증가했으며, 이는 전문경영인들이 보다 객관적이고 보수적인 기준에 따라 투자의사결정을 내린 결과일 수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반면 ‘정상적인 시기’ 재벌 총수의 적극적인 의사결정 개입이 기업의 자원배분 효율성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며 “이러한 연구들은 재벌 총수의 의사결정 참여가 기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생각해 볼 필요성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 “관대한 사법처리를 위한 의도된 신호 효과”
특히 보고서는 “관대한 사법처리를 위한 의도된 신호 효과”라며 “총수가 이후 유리한 양형을 얻을 목적으로 자신의 기업의 경제적 기여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평시보다 더 적극적인 투자 확대를 지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보고서는 “분석 결과, 재벌 총수의 형사처벌은 해당 기업집단 소속 상장 계열사의 경영 성과 및 투자 의사결정에 유의미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총자산수익률(ROA), EBITDA 마진, 토빈큐와 같은 수익성과 성장성 지표는 같은 기간동안 형사사법절차에 휘말리지 않은 다른 기업집단의 비교기업과 비교했을 때 유의미한 차이가 관측되지 않았다”며 “결론적으로 재벌총수의 사법처리는 경영성과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재벌 지배주주의 사법처리가 기업의 투자결정을 위축시킨다는 재계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지배주주의 유죄 판결이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을 지체시킬 것이라는 가정이 실제 데이터로 뒷받침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투자 증가가 형사처벌 개시 2~3년 후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기업이 지배주주의 부재 상황에 적응해 정상적인 의사결정 체계를 구축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즉, 지배주주의 ‘강한 리더십’이 없어도 기업이 중요한 투자결정을 수행할 수 있다는 증거로 이해된다. 이러한 결과는 지배주주의 존재가 기업 운영에 있어 절대적 요소는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