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26일 “삼성반도체 여성노동자 ‘만성 신장병’에 대한 서울행정법원의 산업재해 인정 판결을 환영한다”며 “근로복지공단은 항소하지 말고, 아픈 노동자에게 당장 산재 급여 지급하라”고 촉구했다.

사진=반올림
사진=반올림

반올림에 따르면 김OO(76년생, 여성)씨는 1995년 5월 만18세에 삼성전자에 입사해 반도체 기흥사업장 식각공정 오퍼레이터로 일하다 15년 만인 2010년 만성신장병(5기) 및 상세불명의 만성 세뇨관-간질신장염 진단을 받았다.

이에 김씨는 2019년 3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산재) 요양급여 신청을 했으나, 2년의 역학조사를 거쳐 2021년 7월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업무적인 요인으로 신장질환이 발병 또는 악화되었다고 인정할 만한 과학적인 근거나 입증은 부족하다고 판단돼 업무와 신청 상병 간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불승인 처분했다.

이에 A씨가 법원에 소송을 냈고, 법원이 받아들였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단독 장우석 판사는 지난 9월 8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근무하다 퇴사한 여성노동자 A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A씨의 ‘만성신장병’에 대해 산업재해를 인정하는 판결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앞서 내린 요양불승인 처분이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사회보장 목적과 기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잘못됐다는 것이다.

장우석 판사는 “산재보험제도는 공적보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는 목적이 있다”며 “산업재해 발생 원인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근로자의 취업 당시 건강상태, 질병의 원인, 작업장에 발병원인이 될 만한 물질이 있었는지 여부, 발병원인 물질이 있는 작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등의 여러 사정을 고려해 경험칙과 사회통념에 따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면서 “이때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사회 평균인이 아니라 질병이 생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기준을 제시했다.

장우석 판사는 “첨단산업 분야에서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질병에 대해 산업재해보상보험으로 근로자를 보호할 현실적ㆍ규범적 이유가 있는 점, 산재보험제도의 목적과 기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이른바 ‘희귀질환’ 또는 첨단산업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나아가 작업환경에 여러 유해물질이나 유해요소가 존재하는 경우 개별 유해요인들이 특정 질환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ㆍ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를 언급했다.

장우석 판사는 “위 법리에 비추어 여러 사정들을 종합해 보면, 원고가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15년간 근무하는 동안 신장독성이 있는 유기용제 등 유해물질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점, 신장질환 위험을 높인다고 알려진 교대근무를 수행한 점 등 작업환경상 유해요소들이 원고의 체질 등 다른 요인과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해 상병이 발생했거나 적어도 자연경과적인 진행 속도 이상으로 발병을 촉진 내지 악화시켰다고 추단함이 상당하다”며 “따라서 병과 원고의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반올림은 “A씨의 산재 인정까지 4년이 걸렸다”며 “치료와 생계를 위해 산재가 인정되기를 오래 기다려온 만큼 근로복지공단은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을 겸허히 수용하길 바란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반올림은 “근로복지공단은 불과 두 달 전에도 반도체노동자의 파킨슨병, 백혈병 산재 인정 판결에 대해 줄줄이 항소하는 부당한 행태를 자행했다”며 “이번 만성신장병에 대해서도 또 다시 항소한다면 공단의 존재 목적에 반하게 적극적으로 산재를 가로막는 기관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면서 “4년이나 지연된 시간을 고려해 공단이 항소하는 일만큼은 없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반올림은 “또한 반복되는 불승인 판정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며 “근로복지공단은 더 이상 무리한 과학적 증명을 노동자에게 요구하지 말고, 산재보험취지를 고려해 규범적 관점에서 업무와 질병 간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강제할 수 있도록 법제도 정비 및 공단 판정위 개혁 등 근본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임자운 변호사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임자운 변호사

◆ 반올림 소송단 임자운 담당변호사

반올림 소송단 임자운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무엇보다 노동자의 과거 업무환경에 대한 노출 자료가 존재하지 않을 때, 법원은 그 업무에 관한 여러 간접사실들을 적극적으로 살펴 과거의 노출 정도를 추단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임자운 변호사는 “A씨의 업무환경을 조사한 산보연(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그 업무환경에 만성신부전과 의학적 관련성이 인정되는 여러 유해요인들(유기용제, 비소, 교대근무 등)이 복합적으로 존재했음을 확인했다”며 “그런데 별 근거없이 ‘노출수준은 높지 않았을 것’이라 했고, 결국 ‘업무관련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다”고 지적했다.

임자운 변호사는 “법원은 이러한 판단이 산재보험제도의 목적과 2017년 대법원 판례 취지에 맞지 않다고 봤다”며 “원고의 업무 내용과 업무 공간의 특성, 삼성 반도체 공장의 유해물질 관리 실태 등 원고가 업무 중에 유기용제 등에 상당 수준 노출되었음을 추단할 수 있는 사정들이 많았고, 2010년 이전 노출 자료를 확인하지 못한 것에는 사업주(삼성전자)가 관련 자료를 다 폐기했다고 주장한 탓이 컸다”고 말했다.

임자운 변호사는 “또한 여러 유해물질에 복합 노출되었을 때 그 유해성이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고, 원고가 어린 나이 때부터 야간근무가 포함된 교대근무를 수행했다는 점도 신장질환의 발병 혹은 악화와의 관련성을 배제하기 없었다”며 “법원은 이러한 사정들을 적시하며 원고의 신장질환과 업무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 원고 김OO씨 남편 “공단이 항소 않길” 호소

남편은 “아내가 복막투석을 오래 해서 현재는 월, 수, 금 주3회 혈액투석을 하고 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며 “산재 인정 판결을 받아 좋긴 한데, 항소할까봐 걱정이다. 산재 접수하고 4년을 기다린 만큼 공단이 항소하지 않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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