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기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김관기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독립이란 무엇인가, 근대란 무엇인가>

조선은 오랜 기간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일본의 강요에 의한 1876년 개항 이후의 일. 급격한 혼란 속에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에서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직접 통치를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청나라 자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봉기 당시 조정의 진압 요청을 받아 청나라 군대가 더 들어오자 일본은 조약에 따라 같이 출병한다는 명목으로 청일전쟁을 벌여 이겼다. 그 후 일본은 이전의 청나라에 대신하여 조선에 지배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인가. 전면적으로 무력을 투사하는 것은 국력이 모자랐을 것이고, 천년도 넘은 반일의 스토리가 있는 조선에서 통치를 확립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중국에도 숟가락을 얹고 있는 영국과 유럽, 러시아, 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의 눈치도 보아야 했으리라. 청나라 군대 덕분에 두 차례의 정변에서 권력을 지킨 조선왕실은 말할 것도 없고, 청나라가 유럽 군대 때문에 기울어지는 것을 본 지배층으로서야 요즘 말로 멘붕이었으리라.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인데, 왕실과 지배층은 스스로 메울 능력이 없었으니, 가까이에서 무력을 투사할 수 있는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망국으로 가는 길이었으리라.

침략자들은 3백년 전에도 중국을 쳐들어가니 길을 빌려달라고 그랬듯이 이번에도 거대한 제국의 길을 나아가고자 했다. 일제 침략자들은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쉽게 병합, 동화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로서 제도를 비슷하게 변경하는 것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는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나라 일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만들고, 도성 북서쪽에서 들어오는 청나라 사신의 도착을 맞아들이는 관문이던 영은문(중국 천자의 은혜를 맞아들인다는 의미)을 헐었다. 바로 그 자리에 유서 깊은 제국주의 수도인 파리에 건립된 개선문의 미니어처 문을 세우고 독립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문은 어찌 보면 친일의 상징이라고 하겠다. 현대 한국 어느 정권의 담당자들이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구가한 3.1운동을 기념하는 날에 독립문 앞에서 반일의 메시지를 전하는 행사를 열었던 것은 담당자나 지도자나 제대로 고증할 식견이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대문독립공원은 서울구치소가 1987년 의왕으로 이전하기까지 사용하던 자리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곳에 갇혀 억울하게 탄압 받고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로 꾸며져 있다. 침략자들에게 포획된 대한제국이 한성감옥으로 설치하였다가 그 후 나라가 망한 다음에는 일제가 경성형무소로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시절에는 청년이던 초대 이승만 대통령도 국왕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몇 년 동안 수감되었다고 하고, 일제시대에는 유명한 독립투사들이 여기를 거쳐 갔고, 한편 유명한 분들이 여기를 많이 거쳐 갔을 것이고, 해방 이후 민주공화국에서도 조봉암 선생을 비롯한 정치범들이 사형집행으로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을 보면, 재판 받기 전 미결구금과 원칙적인 자유형, 중죄인에 대한 비공개 교수형이라는 근대 형사재판제도가 처음 적용된 현장이기도 하다. 그것이 설치되기 이전 조선의 형벌은 조금 더 가혹하였다. 기약 없는 구금, 자백할 때까지 가하는 고문, 형사변호의 부재는 물론이요, 천주교 탄압시 신자들을 집단학살한 것이나 상해에서 암살당한 죽은 김옥균의 시체를 다시 훼손하여 효수한 예에서 보듯이 재판 없는 처형까지 횡행하던 시절로부터 벗어나 조금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닮아가기 시작한 증거인 것이다. 독립투사나 민주화투사 뿐만 아니라, 여자 제자들을 꼬여내 성폭행을 하고, 남자 제자를 납치하여 죽이는데 이용한 흉악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체육선생도 사법절차에 의한 재판을 받아 사형 집행을 받았고, 강도범, 강간범, 상습절도범, 폭력사범도 근대적 외양을 가진 재판절차를 거쳐 징역을 갔다. 이것은 나름 사유재산을 중심으로 시장경제를 추구한 부르주아적인 시민법체계가 시작된 현장인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근대화’를 침략자들이 시행한 것은 조선을 병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일본이 침략하지 않았더라도 조선은 이미 근대화의 단계를 시작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기는 하다. 어차피 시간이 경과하면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정치, 법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발전한다고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의 불가역성이라는 범주는 우리들 인류가 피할 수 없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우리는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늦었던 것이고, 근대화는 침략자들과 같이 왔던 것이다. 침략자들이 들여온 근대화는 말하자면 다음에 보듯이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적인 법체계인 것인데,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았다고 보는 관점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때 그 상황에서는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나가버린 일이고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여러 우연이 겹쳐 도둑처럼 1945년 해방이 찾아와 침략자들이 물러가고 북쪽은 사회주의 소련의, 남쪽은 자본주의 미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제각기 그 후원 하에 정부를 설립하고, 전쟁까지 한 번 거치고 간헐적으로 서로 무장공격까지 하는 70년이 지나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체제를 공고화하고 있다. 북쪽에서는 일제 침략자들이 만들어 놓은 공장이나 발전소 같은 물적 토대는 그대로 이용하는 대신에 그들이 이식한 근대적 사법제도는 거의 철폐하였다. 소유권을 없애고, 민사법을 없애고, 또 변호사를 없앴다. 모든 것이 지도자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구체적 질서가 실현되었다.

반면에 남쪽은 일제 침략자들과 함께 왔지만 본질적으로는 서구 자유주의의 산물인 근대 민사, 형사법을 그대로 존치하였다. 정부의 규제는 많아지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였지만 정부가 플레이어가 되어 경제활동을 하는 영역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제한되어 있다. 남쪽의 형편은 지난 세기의 침략자이자 식민모국이던 일본과 경쟁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해진 반면, 북쪽은 인도적 지원이 없으면 신체적 건강을 기약하기도 힘든 처지이다.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이었는 지는 거의 분명하다.

그런데, 북쪽의 선택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남쪽에는 나름 존재한다. 자유로운 나라를 추구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런 생각이 다수가 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대륙의 중국과 해양세력 일본이 부딪히는 단층에 우리나라가 있는데, 어떠한 계기로 이 단층이 무너질 때 우리는 다시 내전을 겪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중국이 기존의 실효적 지배영역을 팽창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가 상징하는 바는 지금도 유효한 것인가 성찰해 볼 때이다. 과거 중화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근대시민적 법질서 말이다.

<위 글은 법률가의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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