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관기 변호사 “소유권과 그 한계”
[칼럼] 김관기 변호사 “소유권과 그 한계”
  • 로리더
  • 승인 2022.07.0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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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김관기 변호사(김박법률사무소)
김관기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김관기 변호사

<소유권과 그 한계>

지난 세기에 민법을 배운 우리들은 19세기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는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로 인하여 그 유용성에 한계를 노출하였으므로, 그 폐단을 보완한 수정자본주의 내지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운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변을 교과서 언저리에서 자주 보았다. 법률 책에서 표현되는 바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상부구조인 민사법의 3대원칙 즉 생산수단의 사유, 자유로운 계약 및 과실책임의 원칙은 수정이 되어, 절대적 소유권의 보호 대신에 상대적 소유권을 수용하여야 하고 계약자유 대신에 계약의 제도화 내지 강제가 필요하며, 무과실책임의 도입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형(ideal type)과 실제로 겪은 현실을 혼동한 것으로서 정당한 평가가 아니다. 즉 실재를 인식하기 위하여 적합한 현상을 모아 통일적인 모습으로 만든 추상적 개념인 이상형의 일종인 민법의 3대 원칙이 순수한 형태로 실행된 것이 아닌데, 그 결과가 불만족스럽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의 소유권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자유의 기반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무한히 존중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시정한다는 명목으로 또는 봉건적 연혁으로 인하여 제한을 받았다. 유상 또는 무상으로 수용 당했다. 또 계약의 자유라는 것도 당사자가 되는 개인 사이에 교섭력의 차이가 현저한 상황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다. 상어와 갈치 사이에, 사자와 토끼 사이에는 자유로운 계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현실에서, 보다 많은 사람이 자산을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사적 소유권의 원칙을 보강하는 것이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근로계약이나 유틸리티계약에 있어서 계약의 강제처럼 보이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교섭력의 우위에 있는 상대편과 맞서는 근로자, 소비자의 지위를 지지하여 계약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무과실책임도 근대 민법의 원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위험을 회피할 책임이 있는 당사자에게 그 위험으로 인한 결과를 책임지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이념형으로서 근대 민법의 3대원칙은 포기된 바가 없는 것이다. 현실이 불만스럽다고 이상을 탓하지 말 일이다. 현대의 모든 경제규제법은 근대 민법의 3원칙이라는 이상을 철폐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원칙을 실효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하여 개인을 지원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런 명분으로 온갖 규제가 만들어진다.

토지공개념이라는 말이 있다. 개인의 토지 소유를 철폐하고 공적으로 보유하자는 말이 아니라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충분한 공법적 규제와 충분한 과세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고 무슨 새로운 개념을 도입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토지의 사용규제와 과세에 있어서 역대 정부는 그렇게 무능하지 않았다. 이것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1980년대 모 공법학자가 “영국에는 토지에 관하여는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영국의 토지법제가 소유권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법적 술어로서는 소유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맞는 듯하다. 그들은 1066년 노르만의 정복 이후 잉글랜드의 모든 땅이 윌리엄 왕의 것이라고 선언하여 몰수하고 이것을 가신들에게 봉토로 나누어 준 것에서 기원하여, 왕이 도로 회수해가지 않는 영구임차권이 되고, 이것이 봉건적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유롭게 양도되면서부터, 토지에 대한 완전한 지배로서의 재산권 즉 실질적 소유권이 확립된 역사적 이유가 있을 뿐, 토지에 관하여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밥을 빵이라고 부른다고 하여 쌀에 물을 넣어 익힌 물건이 밀가루를 오븐에 찐 물체로 변경하는 것은 아니듯이, 토지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임차권이라고 부른다고 하여, 그것을 보유하는 자를 임차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위 공법학자는 명목을 들어 실질을 변경하려는 시도에 불을 붙였다.

사실 소유권은 타인을 배제한다는 점에 가장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유권은 소유자가 아닌 타인에 대한 권력을 의미한다. 토지 소유권이 정부에 집중되어 버리면 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 개인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한다. 트로츠키가 말한 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명령이 실행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겉으로는 시장경제를 채택한 개발도상국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즉, 소유권이 극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집중된 사회에서 국민 대다수가 무산자인 상태의 절대빈곤 상태에서 구걸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상태에 처하면 국민은 희망을 잃고 다른 나라로 탈출하고자 하거나 모택동 사상에 따라 가출하여 유격대가 되기 쉽다. 멕시코 사람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살 길을 찾아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는 것이나 한 술 더 떠서 그 강을 건너는 대열에 참여하기 위하여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걸어서 수천리 길을 걸어가는 사례도 있다. 평등하지 않은 토지소유권의 구조가 억압을 야기하는 양 극단이라고 하겠다. 소유권은 경제적 자유를 제공해주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적 자유의 기반이기도 하다. 인쇄소가 국영인 나라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책이 출판될 수 없고, 모든 서버가 중앙의 통제를 받는다면 정치적인 댓글은 하나도 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는 법치를 보장하므로 경제발전의 장애를 제거하기도 하니 선순환이다.

196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으로 분류될 정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어 이제는 구매력지수(ppp) 기준으로는 일본을 추월하였다고도 말한다. 그동안 대부분의 국민이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일 것인데, 그러한 의욕을 일으킨 것은 국민 각자가 저축과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자산 즉 생산수단의 사유화였고, 그것이 비교적 평등하게 되도록 이루어진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 즉 적산(敵産)은 미군정이 무상으로 몰수하여 민간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50년의 농지개혁은 이 나라를 자영농의 나라로 만들었는데, 농지개혁에서 농지를 매수 사실은 몰수당한 지주들은 싼 가격에 적산을 받아 산업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높은 수준의 재산의 평등을 이룩한 상태에서 수출지향적 공업화, 도시화, 이농, 대외개방은 우호적인 국제정세 하에서 전반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해냈다. 나라의 창설이라는 혁명적인 상황에서 과거의 소유권을 다시 규정한 것은 일견 소유권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향후 게임의 기초가 되는 여건을 정한 것일 뿐이다.

농지개혁을 실시한 나라는 여럿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얻은 상태가 지속된 나라는 많지 않다. 마을의 지주가 또는 부재지주가 영세농민에게 여러 가지 사유로 고리대금을 하고, 상환하지 못하는 채무자의 농지를 법률적인 방식으로 빚 대신 취득하게 되면, 농지개혁의 효과는 불과 몇 년 만에 사라져 버린다. 남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는, 관혼상제 때 빚을 내서 이를 갚을 방법이 없으면 나중에는 노역으로 상환하는데 이것을 노임 지급 상당액으로 평가하지도 않고 한다고 해도 원리금에 미치게 계산한다고 한다. 그래서 농민은 사실상 채권자의 집을 경작하는 노비가 되고, 여자는 빚 대신 도시에 팔려가서 몇 년 동안 매춘생활을 강요당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계약자유라는 명목으로 행하여지는 이런 거래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배들은 농지의 처분에 제한을 두었고, 구입에도 한도를 두었다. 이것도 부족하여, 1961년의 군사정변을 일으킨 도당은 농어촌고리채를 조사하여 정리하는 과격한 조치까지 취하였다.

요약하면, 사적 소유권은 권력의 분산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인적 자유의 기반이 된다. 현실이 어떻든 이상형으로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었다. 그 전제로서 소유권의 분산이라는 조건이 결여될 때에는 혁명적인 개혁이 불가피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형으로부터의 이탈 및 그 반대인 사회주의, 공산주의로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일방적인 약탈을 내용이라는 거래가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질 때 이것을 규제하거나 그 결과를 사후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계약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결과를 생성하는 계약의 여건을 만드는 것으로 계약자유의 실질적 실현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사적 소유권의 원칙은 의연 유효하다. 자본주의는 평등에 대한 약속을 기초로 존립한다는 말을 필자는 하고 싶었다.

<위 글은 법률가의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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