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와 검찰은 ‘국민의 커진 권력과 커진 능력’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이원영 교수

가히 ‘사법테러’에 가깝다. 올초 국회에서 탄핵소추된 임성근 전 판사에 대해 최근 서울고등법원의 형사재판부가 무죄를 내린 판결은, ‘월권행위는 무죄’라는 해괴한 논리로 사회를 강타한 ‘테러’나 다름없다. 마치 그 재판부 판사의 집에 도둑이 들어도, ‘도둑질할 권리가 없는 자가 도둑질을 했으므로 무죄’라는 것.

우리 사법신뢰도가 OECD 꼴찌인 이유를 알만하다. 최근의 ‘정경심’ 재판 ‘김학의’ 재판 그리고 구속되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서슴없었던 사법농단도 그 이유가 미루어 짐작이 된다.

이런 사법부가 무색하게도 검찰마저 세상을 어지럽혀 왔다. 가령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 시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받는 절차는 헌법상의 국민주권을 대리하는 행위인데, 이를 방해한 것은 쿠데타와 마찬가지다. 검찰은 그동안 사학비리를 대놓고 비호해왔고, 최근에도 수사 중 정보를 언론에 흘리는 검언유착의 불법을 저지르고 다닌다.

왜 이럴까? 우수한 성적으로 임관된 그들이, 국가의 녹을 먹는 그들이 보통사람의 멀쩡한 정신으로는 저지를 수 없는 그런 작태를 보이고 있다니. 짐작되는 이유의 하나는 권력과 관련된 퇴행적 본능이다. 일테면 조폭 2인자가 가끔 삐딱한 짓을 하는 것은 권력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확인하고 싶어서다. 그러다가 두목에게 얻어맞는 순간 정신을 차린다. 그 퇴행적 본능으로 얻게 된 ‘얼차려’가 하위조직을 통솔하는 이치가 된다. 오랜 독재권력에 길들여진 그들이, 민주사회로 접어들면서 통제를 벗어난 환경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이 커진 탓일까? 완장권력에 지나지 않았던 그들 눈에 민주세상에는 뚜렷한 두목이 보이지 않으니 스스로 권력자인 듯한 도취에 빠진 것일까?

하지만 착각이다. 국민이라는 진짜 두목은 더욱 강해져서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요즘 한국 국민은 경제성장과 촛불혁명에 이어 코로나 팬데믹 대응에서 보듯이 IT소통능력을 갖춘 집단지성이라고 일컬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있다. 국민이 리더이자 두목인 시대가 온 것이다. 국민의 권력과 능력이 과거와는 비할 바 없이 커졌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사법부의 경우 국민참여재판제도가 도입되긴 했지만,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거론돼온 개선책에 더하여 보다 구조적인 변화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일테면 가칭 ‘시민법정’제도를 운영할 만하다. 주인인 국민의 관심을 모으는 중요한 재판의 경우에는, 가상의 ‘시민법정’을 열어서 판사ㆍ검사ㆍ변호사 역할을 희망하는 모든 시민이 추첨으로 맡아서 온라인에서 공개적으로 재판과정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 논지가 현실의 재판과도 대비될 수 있도록. 그런 과정을 미리 거치면 차이는 있을지언정 상식에 어긋난 판결은 내릴 수가 없게 된다. 지금 같은 세상에는 손쉽게 이런 기술적인 방법의 동원이 가능하다.

검찰도 구조적 개선의 방안이 있다. 미국의 검사장 직선제와 같은 권력생성의 구조를 바꾸는 방안이 있다. 검찰조직의 중간허리의 자리를 주민들이 임기제로 선출하는 시스템이다. 적극적으로 검토할만하다. 부작용을 거론하는 이도 있지만, 기술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요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 이런 방식이라면 ‘검사동일체’라는 해괴한 개념을 해체할 수 있으리라.

지금 기술적으로는 사법부나 검찰이라는 조직을 없애버려도 수사나 기소의 실무에 지장이 없고, 오히려 더욱 공정한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예측도 있다. 대의민주주의로부터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사법부나 검찰이라는 이름의 조직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커진 권력과 커진 능력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제대로 자정능력을 확립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仁)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하면, 곧 인은 다가온다.”

<위 글은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저작권자 © 로리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