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비폭력 신념을 이유로 예비군훈련을 거부한 남성에게 대법원이 진정한 양심에 따른 것으로 봐 무죄를 확정했다.

종교적 신념이 아닌 윤리적ㆍ도덕적ㆍ철학적 신념 등을 이유로 예비군훈련을 거부한 사안에서 진정한 양심에 따라 예비군훈련을 거부한 것으로 봐 예비군법과 병역법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한 최초의 사례라고 대법원을 밝혔다.

법원에 따르면 A씨는 2013년 2월 제대하고 예비역에 편입됐으나, 2016년 3월부터 2018년 4월 사이 16회에 걸쳐 예비군훈련과 병력동원훈련 소집통지서를 받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불응한 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에 따르면 재판 과정에서 A씨는 어릴 적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는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A씨는 “미군이 헬기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동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후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잘못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고, 그것은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됐다”고 밝혔다.

A씨는 군 입대를 거부할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입영 직전 이를 알게 된 어머니와 친지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군에 입대했다.

A씨는 군에 입대해 신병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적에게 총을 쏘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대를 후회했고, 그 후 군사훈련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보직에 지원해 군복무를 마쳤다.

A씨는 군에서 제대하고 예비역에 편입됐으나, 더 이상 양심을 속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인간에 대한 폭력과 살인의 거부’라는 비종교적 신념에 따라 일체의 예비군훈련 등을 모두 거부했다.

A씨는 병역의무 중 가장 부담이 크다고 할 수 있는 현역 복무를 이미 마쳤음에도 예비군훈련만을 거부하기 위해 수 년 간의 조사와 재판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형벌의 위험, 안정된 직장을 얻기 어려워 입게 되는 경제적 어려움 등을 모두 감수했다.

1심과 2심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법리가 ‘양심을 이유로 예비군훈련과 병력동원훈련을 거부한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피고인의 경우 진정한 양심에 따라 예비군훈련과 병력동원훈련을 거부했다”고 인정해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했다.

지난 2018년 11월 전합합의체 판결에서 대법원은 “이미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경우뿐만 아니라 윤리적ㆍ도덕적ㆍ철학적 또는 이와 유사한 동기에서 형성된 양심상 결정을 이유로 집총이나 군사훈련을 수반하는 병역의무의 이행을 거부하는 경우 그것이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경우라면 병역법 제88조 제1항 제1호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사건은 검사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1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25일 예비군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예비군법 제15조 제9항 제1호와 병역법 제90조 제1항 제1호는 병역법 제88조 제1항 제1호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국방의 의무를 구체화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고, 예비군훈련과 병력동원훈련도 집총이나 군사훈련을 수반하는 병역의무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병역법 제88조 제1항 제1호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법리에 따라 예비군법 제15조 제9항 제1호와 병역법 제90조 제1항 제1호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를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따라서 종교적 신념이 아닌 윤리적ㆍ도덕적ㆍ철학적 신념 등에 의한 경우라도 그것이 진정한 양심에 따른 예비군훈련과 병력동원훈련 거부에 해당한다면 예비군법 제15조 제9항 제1호와 병역법 제90조 제1항 제1호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편, 대법원 공보관실은 이번 판결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아닌 피고인이 종교적 신념이 아닌 윤리적ㆍ도덕적ㆍ철학적 신념 등을 이유로 예비군훈련과 병력동원훈련을 거부한 사안에서 진정한 양심에 따라 예비군훈련과 병력동원훈련을 거부한 것으로 봐 예비군과 병역법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한 최초의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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