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는 등으로 발언해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공안검사 출신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원 이사장이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부산의 학림(學林) 사건인 ‘부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공안당국이 부산에서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등을 영장 없이 체포한 뒤 불법 감금하며 구타 및 고문한 사건이다.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던 노무현ㆍ김광일 변호사 등이 무료변론을 했다.

1982년 10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던 일부 피고인들이 2012년 8월 재심을 청구해 2014년 9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문재인 변호사는 일부 재심사건의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부림사건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 수사검사였던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원(방문진) 이사장은 2013년 1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보수단체 행사에 참석해 18대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국회의원을 비방했다.

당시 고영주 전 이사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대통령이 되게 해 준 부림사건에 문재인 후보도 변호사였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문재인 후보나 부림사건이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거를 잘 알고 있다. 노무현 정권 때 청와대 부산인맥은 부림사건 인맥이다. 전부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 후보도 공산주의자이고,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다”라는 등의 발언을 했다.

문재인 의원은 2015년 9월 고영주 전 이사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문재인 의원이 대통령이 된 후인 2017년 9월 “공연히 허위사실을 적시해 피해자(문재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 전 이사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이 있는 서울법원종합청사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이 있는 서울법원종합청사

1심인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김경진 판사는 2018년 8월 “피고인의 발언이 피해자의 사회적 가치와 평가를 저하시키는 내용이 아니고,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해 고영주 전 방문진 이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검사는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에는 사실오인 또는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며 항소했다.

항소심인 서울중앙지방법원 제9형사부(재판장 최한돈 부장판사)는 지난 8월 27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고영주 전 이사장에게 1심을 파기하고, “피고인은 공연히 허위사실을 적시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유죄를 인정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노무현 정권 정치인사들이 대체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이들이 모두 부림사건 관련자이고, 더 나아가 적화통일을 꿈꾸는 과격한 공산주의자라는 결론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해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변호사가 어떤 형사사건에서 변호인으로 활동했다고 피의자 또는 피고인과 동일한 생각이나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고, 법률전문가인 피고인이 이 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오랜 기간 공안검사로 활동하면서 전문성을 인정받아 온 사람이고, 피해자는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국민들의 이익과 안녕을 수호할 의무가 있는 정치인인바, 피고인이 피해자를 공산주의자로 표현한 것은 피해자의 정치적ㆍ도덕적 이미지에 중대한 타격을 입히는 행위로 보기 충분하다”며 “피고인의 발언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재판부는 “피고인은 4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법조인이자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말이 여론에 미칠 파급력을 예상해 공개석상에서의 발언에 더욱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럼에도 피고인은 군중 앞에서 허위사실을 이야기하고 이에 터잡아 피해자를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을 꾀하는 반사회적 인사로 매도했다”며 “이는 피해자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비판이나 의혹 제기 수준을 넘어 피해자의 정치적ㆍ도덕적 기본입장을 단정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어서 표현의 자유에 상응하는 책임을 다한 발언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발언은 단순히 피해자의 진보적 성향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나 부정적인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마치 증명된 진실인 것처럼 대중들 사이에 회자되거나 확대ㆍ재생산되면서 국민들의 판단을 흐릴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로써 보호하려는 가치, 즉 건전한 비판과 토론을 통한 민주주의 여론 형성이라는 목적과도 부합하지 않는다”며 “그렇다면 피고인의 명예훼손적 발언은 표현의 자유로써 보호받을 만한 이익이 미미한데 비해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에 미친 해악이 크므로,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일탈해 위법하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양형과 관련 재판부는 “피고인은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물로서 공적 관심사안에 대한 발언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무책임하게 적시하고 독단적 결론을 도출해 공공연히 표명함으로써 유력 정치인인 피해자의 명예에 타격을 입혔다”고 말했다.

또 “피고인의 발언은 특히 보수진영 사람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돼 확산되면서 피해자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흠집내기 수단으로 활용됐고, 피고인 스스로도 이런 결과를 충분히 예상했을 것으로 보여 비난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다만 “피고인은 피해자의 정치적 행보에 타격을 입힐 의도로 발언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런 연설 요청에 따라 즉흥적으로 발언하게 된 점, 비록 피고인의 발언이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기는 했으나, 이에 대한 과도한 형사처벌은 정치적 사안에 대한 생산적인 비판과 건전한 견해표명마저 위축시킬 위험이 있는 점 등을 참작해 형을 정했다”고 양형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다시 판단을 받게 됐다. 고영주 전 방문진 이사장은 항소심의 유죄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고, 검사도 상고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k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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