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권순일 대법관)는 민주선거 70주년을 맞이해 1948년 5월 10일 최초의 민주선거인 제헌국회의원선거부터 올해 제7회 동시지방선거까지 우리나라 선거 역사를 정리한 ‘대한민국을 만든 70가지 선거이야기’를 발간했다고 11일 밝혔다.

‘대한민국을 만든 70가지 선거이야기’는 총 3부로, 일러스트ㆍ사진ㆍ도표를 활용해 선거사의 중요한 사건이나 발전 과정을 이야기 형식으로 쉽고 재미있게 구성했다.

1부 ‘선거 70년의 여정’에서는 1948년 5ㆍ10 총선거부터 대통령 궐위에 의한 제19대 대통령선거까지 선거사의 33가지 역사적 순간이 담겨져 있다.

2부 ‘공명정대한 선거제도’에서는 1958년 현행 공직선거법의 모태가 된 ‘민의원의원선거법’ 제정과 후보자 난립을 방지하는 기탁금제도, 1960년 부재자 투표제도, 1963년 독립적인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창설 등 선거제도와 선거관리기관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3부 ‘아름다운 선거문화’에서는 1989년 동해시와 영등포구을 국회의원재선거에서부터 시작된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행위 단속, 2004년 금권선거 근절을 위해 도입된 50배 과태료ㆍ신고포상금 제도 등 선거법 위반 예방‧단속 및 홍보활동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을 만든 70가지 선거이야기’는 선관위 전ㆍ현직 직원으로 구성된 10명의 편찬실무단이 원고를 작성하고 선거ㆍ한국사ㆍ교육 분야 전문가가 감수를 맡았으며 국회, 국ㆍ공립도서관, 대학교, 정당ㆍ학회 등 관계기관에 배부될 예정이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대한민국을 만든 70가지 선거이야기’가 선거의 의미와 중요성을 되새기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선거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유용한 자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을 만든 70가지 선거이야기> 주요 내용

▣ 정당대결과 선거구호가 등장한 첫 선거

‘사사오입 개헌’ 이후 치러진 1956년 제3ㆍ4대 정ㆍ부통령선거는 선거사상 최초로 집권여당과 야당이 후보자 지명을 통해 정당대결로 진행되었다.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을, 민주당은 신익회와 장면을, 진보당창당추진위원회에서 조봉암과 박기출을 각각 정ㆍ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역사적인 선거구호가 등장했다. 민주당의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봉암 후보 역시 “갈지 못하면 살 수 없다”,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에 살 길 없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이에 자유당은 “가러봤자 더 못 산다”, “구관이 명관이다”는 구호로 맞섰다. 선전벽보에 정당, 이름, 사진만 인쇄되었던 이전 선거와 달리 후보자의 지향을 한 마디로 압축한 선거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이 선거에서 최초로 네거티브 전략이 등장했다. 자유당은 조봉암 후보를 좌익으로, 민주당을 친일파로 몰았다. 민주당 역시 조봉암 후보를 대권병 환자로 몰아세웠다.

▣ 중선거구제가 도입된 첫 번째 선거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된 이후 선거제도가 바뀌어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선거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선거구제를 도입한 선거였다. 중선거구제로 선거구마다 2명을 뽑게 된 만큼 선거구 숫자가 73개로 대폭 줄었다. 역대 최소 선거구였다.

지역구가 73개로 줄면서 공천을 받기 위한 당내 경쟁이 치열했다. 선거운동 모습도 많이 바뀌어 과거 여야 간 사생결단식으로 경쟁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다소 느슨한 선거운동 모습이 나타났다. 심지어는 무소속을 견제하기 위해 여당과 제1야당 사이에 공조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지역개발은 여당 후보에게, 현실 소외감 해소는 야당으로”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고 여야 후보가 동시에 무소속 후보자를 봉쇄하는 전략까지 등장했다.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은 73명, 신민당은 52명 당선되었고, 여촌야도라는 말이 무색하게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여야 후보자들이 동반 당선되었다. 다만, 야당 당선자들은 신민당과 민주통일당, 무소속이 나눠 갖는 식이어서 여당인 민주공화당만 절반의 지역구를 모두 획득할 수 있었다.

▣ 월드컵의 열기 속에 첫 40%대 투표율을 기록한 선거

2002년 6월 13일 제3회 지방선거는 21세기가 시작된 이후 처음 맞는 전국 규모 선거였다. 또 선거기간이 한일월드컵축구대회 기간과 겹쳐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던 힘든 선거였다. 월드컵 개막전이 5월 31일인데 선거일은 6월 13일이니 후보자등록이 막 끝나고 선거운동을 하려 할 때 월드컵이 시작되는 셈이었다.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지방선거일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월드컵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 정몽준 의원이 2000년부터 지방선거일을 월드컵 전후로 조정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선거일을 1~2개월 앞당기는 조기실시 방안이 유력했는데 여야 정치권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한나라당은 5월 9일 실시로 당론을 확정했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도 처음에는 5월 중순으로 앞당기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반발에 부딪쳤다. 결국 여야 협상 결과 예정대로 6월 13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선거일은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바꾼다면 법 규정이 있으나마나한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 허위사실에서 비롯된 사상 초유의 대통령선거 재검표

제16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 12월 20일 밤 11시 인터넷에서는 괴문건이 나돌았다. 국가정보원에서 17년간 근무했다는 ‘정보기관 중견간부의 양심선언’이라는 괴문건에는 정보기관이 전자개표시스템을 조작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개표과정에서 기호 1번이 연속 10여 표 나오면 그중 한 표는 기호 2번으로 돌아가도록 조작했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경찰의 수사결과 이 문건은 울산의 모 특수학교 교사 정씨가 지지 후보의 낙선으로 실망한 나머지 재미삼아 올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주장이 일부 언론사와 한나라당 모 의원 홈페이지, 자유민주연합 홈페이지 등에 게시됐고 다른 웹사이트로 번져나가면서 파장은 일파만파 커지기 시작했다. 이회창 후보 지지자, 창사랑 회원 등은 ‘제16대 대선 재검표추진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한나라당 당사에서 농성하며 서명운동에 착수했다. 한나라당도 당선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에서는 수개표 방식의 재검표를 결정했고, 2003년 1월 27일 대통령선거사상 유례없는 재검표가 실시되었다. 검증대상 투표지는 전체의 44.58%였고, 법원 직원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4,800여 명이 동원되었다. 재검표 결과 이회창 후보의 득표수는 당초보다 135표 늘었고, 노무현 당선자는 785표가 줄어 두 후보 간 격차는 900표 감소했다. 득표수가 변경된 원인은 판정보류와 무효표 처리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은 재검표 결과를 수용하며 관련 소송을 모두 취하하였다.

▣ 현행 선거법의 모태가 된 규제 중심 선거법의 탄생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민주당은 선거법 개정 협상을 진행해 1957년 11월 새로운 선거법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자유당은 공정하고 명랑한 선거 구현을 이유로 각종 규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 했고, 민주당 또한 선거절차의 공정성 확보에 초점을 맞추어 절충해 나갔다. 특히 과다한 정치비용이 소요되는 선거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모두 공감했다.

하지만 개정안의 내용이 알려지자 언론인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합의에 난항을 겪었다. 이들은 언론자유가 선거기간에 더욱 활발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선거운동을 목적으로 한 보도나 논평을 금지하려 한다고 항의했다. 이외에도 자유로운 선거에서 규제 중심의 선거로 바뀌려 하자 국회 안팎으로 반발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법 개정안이 제3대 국회 마지막 날인 1957년 12월 31일 전격적으로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회기가 다 되도록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자 다시 24시간 연장하여 1958년 새해 첫날밤 11시 35분 극적으로 통과했다. 이렇게 여야가 최초로 협상을 통해 선거법을 제정하였기에 이 법을 흔히 ‘협상선거법’이라 불렀다.

‘협상선거법’으로 처음 선거운동을 “당선을 얻게 하거나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로 규정했고, 선거운동기간을 정하여 사전선거운동을 금지했다. 또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 방법도 제한하였다. 기탁금과 선거비용제한액을 정하고 선거비용 회계 지출 보고를 하도록 했다. 이렇게 규제가 강화된 선거법은 일본 보통선거법의 영향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규제와 아울러 정당참관인제 등 공명선거를 위한 제반장치도 마련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협상선거법이 처음 적용된 제4대 국회의원선거는 ‘곤봉선거’니 ‘몽둥이 선거’니 하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경찰의 선거개입이 극심했던 최악의 선거였다. 공명선거 실현을 위해 도입된 규제가 현실적인 관권 개입과 금권‧동원선거 앞에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 후보자 난립을 방지하는 기탁금제도의 도입(1958)

‘협상선거법’에서 처음으로 기탁금제도가 도입되어 후보자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50만 환을 기탁하도록 했는데, 당시 국산자동차 ‘시발’ 한 대 가격이 8만 환이었던 시절 기탁금 50만 환은 방 3개짜리 단독주택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금액이었다. 50만 환이라는 거액은 개인뿐만 아니라 자금력이 풍부하지 않은 소규모 정당의 후보자들에게는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설사 기탁금을 지불하고 선거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유효투표 수의 1/6을 득표하지 못하면 반환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부담이 적지 않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가 끝나고 낙선자 346명의 기탁금 1억 7천 3백만 환이 국고로 귀속되었다. 야당이 압승한 서울에서는 낙선자의 기탁금으로 이천으로 가는 도로를 닦는다는 풍자성 기사가 신문 한 켠을 장식하기도 했다.

후보자 난립을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된 기탁금제도는 2000년대 들어서도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 한 후보자가 기탁금 2천만 원을 모두 동전으로 납부하며 항의하기도 하는 등 크고 작은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

▣ 유권자 의사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개선된 비례대표제

가장 많이 득표한 후보자가 당선되는 단순다수대표제의 한계를 보완하고 투표자의 의사가 선거결과와 비례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이 고안되었다. 1910년 영국에서는 당시 비례대표제가 무려 3백 가지나 된다는 보고서가 있을 정도로 비례대표제에는 더 나은 선거제도를 찾기 위한 노력이 담겨져 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전국구’라는 이름으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처음 도입되었다. 이때는 제1당인 여당의 안정의석을 확보하게 해주려는 의도에서 ‘제1당 몰아주기 방식’을 채택하여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비례적이지 않았다. 제1당의 득표율이 50% 미만인 경우 제1당에 절반을 배분했고, 50%를 넘을 때는 각 당의 득표율에 따라 배분하되 제1당에 배분되는 전국구 의석은 2/3를 넘을 수 없었다. 제1당의 득표율에 따라 의석배분이 달라지는 이런 방식은 제1당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후 제도를 개선해 가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정당의 유효득표율에 따라 배분하기 시작했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1인2표 비례대표제가 시행되었다 중세 교회에서는 성직자를 선출하기 위해 더 나은 선거제도를 고안하는 일을 ‘신의 뜻’을 찾아내는 과업으로 생각했다. 선거 결과가 신의 뜻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일치할 수 있도록 개선해 나가는 일은 신대와 공간을 뛰어 넘는 역사적 과업이다.

▣ 무효표를 줄이기 위한 작지만 큰 노력 기표마크 도입(1992)

1948년 5ㆍ10 총선거부터 1980년대 초까지 선거에서는 표준화된 기표용구가 없었다. 5ㆍ10 총선거 때는 기표소에 마련된 필기용구로 ○, X, V, △, ― 등 다양한 방법으로 기표할 수 있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부터 기표모형을 ○로 규정했으나 기표용구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없어 붓대나 가는 대나무, 탄피 등을 사용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나뭇가지를 사용하기도 했고, 심지어 1960년대 초 강원도 인제에서는 호박꼭지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 때부터 재질과 규격을 통일한 플라스틱 기표용구를 사용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부터 ○ 안에 사람 인(人)자가 들어간 기표마크를 도입했다. 기표 후 잉크가 덜 마른 상태에서 투표지를 반으로 접으면 반대쪽 다른 난에 잉크가 묻어나는 전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人)자가 하필 한글 자음 ‘ㅅ’과 같아서 동그라미 ‘영’ 안의 ㅅ이 당시 유력 대선후보였던 김영삼 후보의 영삼을 연상시킨다며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불필요한 논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이 기표용구는 선거가 끝나고 전량 폐기되었다. 대신 1994년 통합선거법을 제정하면서 기표모형을 점 복(卜)자가 들어간 지금의 형태로 변경했다.

▣ 국민 참여 형식의 선거 홍보 시작

선거를 홍보하는 노래가 만들어지기는 5ㆍ10 총선거를 앞둔 3월 청년조선총동맹이라는 단체에서 ‘총선거의 노래’를 공모하면서부터였다. 공모에는 굉장히 큰 액수의 상금이 걸렸는데 1등 3만 원, 2등 1만 원, 3등 5천 원이었다. 당시 3호봉 공무원 월급이 4,380원, 대기업 사무직원이 9,250원의 월급을 받았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3천 원 이하의 박봉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3등 상금만 해도 웬만한 직장인 한 달 월급과 엇비슷할 만큼 큰 금액이었다.

2년 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도 민정호 작사, 김성태 작곡의 ‘5ㆍ30 총선거의 노래’가 만들어져 선거를 앞둔 사흘간 매일 오전 9시부터 15분간 방송되었다. 이후 4ㆍ19로 정권이 바뀌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공명선거의 노래’가 만들어졌는데 작사가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었다.

1967년 선거관리위원회는 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선거의 노래 공모전을 개최했다. 상금은 3만 원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3,750원, 소주 1병 55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적지 않은 상금이었다. 모두 268편이 응모했는데, 응모작 중에는 “돈바람 선거바람 봄바람과 더불어 술바람 부정바람 옛날얘기”라며 풍자 가득한 가사로 심사위원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심사위원은 백철, 김남조, 송욱 등 당시 내로라하는 문학평론가, 시인들이었다.

치열한 심사를 거쳐 김랑봉의 ‘선거의 노래’가 최종 당선되었다. 여기에 교과서에도 실린 ‘섬집 아기’로 유명한 작곡가 이흥렬이 곡을 붙이고, 우리나라 오페라를 개척하고 한국 대표 바리톤으로 회자되는 황병덕이 1절을, ‘바위고개’ 등 수많은 가곡을 부른 서울대 음대 이정희 교수가 2절을 불렀다.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공명선거의 노래는 2002년 임창정, 김조한, 밀크, 조앤 등 여러 인기가수와 그룹이 참여해 만든 ‘내가 선택한 세상’이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여러 버전으로 리메이크돼 현재까지 애창되고 있다.

[로리더 표성연 기자 desk@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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