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화성사업장에서 근무한 이후 32세에 백혈병이 발병해 짧은 생을 마감한 신정범씨에 대해 법원은 산업재해(산재)로 인정했다.

법원은 특히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대목은 주목된다.

삼성전자
삼성전자

◆ 25세 삼성전자에 입사해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한 후 32세 백혈병 진단 후 사망

서울행정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신정범씨는 2014년 7월 삼성전자에 입사해 화성캠퍼스(사업장)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공정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그는 설비 유지ㆍ보수를 담당했고, 신규라인을 셋업 할 때는 ‘Sub-FAB’이라 불리는 공장 하부 공간에도 자주 출입했다.

신정범씨는 2016년 3월 삼성전자에서 퇴사 후 수어통역센터에서 근무할 당시 눈저림 증상 등을 호소했고, 2021년 3월 대학병원에서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1989년생인 신정범씨 신장은 175cm, 체중은 84kg였다. 위 사업장 외에 백혈병 발병과 관련된 유해물질에 노출될 수 있는 업무를 수행했던 직무 이력은 없고, 다른 질병력도 없었다.

이에 신정범씨는 2021년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삼성전자 근무로 인한 업무상 질병에 해당한다며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신씨로부터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수행한 업무 특성 및 작업내용’ 등이 기재된 재해자 확인서 등의 자료를 제출받았다. 공단은 ‘해당 사업장의 작업환경에 대해서는 기존에 조사된 것이 있으므로 추가적인 전문조사는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추가적인 업무관련성 전문조사를 실시하지는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은 2021년 10월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심의결과 등을 근거로 ‘신정범의 백혈병은 업무와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요양불승인처분을 했다.

이에 신정범씨는 불복해 2022년 1월 요양불승인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는데, 안타깝게도 소송 계속 중인 2022년 11월 19일 사망했다. 25세에 삼성반도체 공장에 입사해 32세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이듬해 짧은 삶을 마감했다. 소송은 어머니가 계속했다.

유족은 “설비엔지니어로서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백혈병을 유발할 수 있는 각종 유해물질과 극저주파 전자기장에 노출됐다”며 “또한 사업장에서 1주 평균 60시간 근무했고, 과중한 근로시간과 스트레스 역시 망인의 업무 과정에서 노출된 유해물질과 극저주파 전자기장 등과 복합적으로 작용해 백혈병 발병 내지 악화에 충분히 기여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유족은 “더욱이 근로복지공단은 망인이 근무할 당시의 업무환경에 대한 개별역학조사 자체를 실시하지 않았으므로, 망인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되어야 한다”며 “이러한 사정 등에 비추어 보면, 백혈병과 망인의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할 것임에도 거부 처분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가정법원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가정법원

◆ 서울행정법원 행정4단독 장우석 판사 “근로복지공단은 신정범에 대해 한 요양급여불승인처분을 취소한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단독 장우석 판사는 지난 7월 7일 신정범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신정범씨의 손을 들어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장우석 판사는 “비록 망인의 사망원인인 백혈병의 발병 경로가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망인이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노출된 유해화학물질, 극저주파 자기장, 과로 및 교대근무 등 작업환경상의 유해요소들이 망인의 체질 등 다른 요인과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해 백혈병을 발병케 했거나 적어도 그 발병을 촉진한 원인이 됐다고 추단함이 상당하다”며 “따라서 백혈병과 망인의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봄이 타당하므로, 이 사건 처분은 위법하므로 취소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장우석 판사는 “망인은 2014년 7월부터 2016년 3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1일 8시간 이상 상시로 근무하며 웨이퍼 가공라인에서 SET-UP 업무, 건식식각 공정 PM 업무, BM 업무 등을 담당했는바, 망인이 위와 같은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백혈병을 유발할 수 있는)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봤다.

이어 “특히 망인은 건식식각 공정을 담당하며 IPA, 염화수소(염산), 불화수소(불산) 등의 유해물질에 직접 노출되거나 부품을 교체 세척하는 PM 작업 과정에서 장비 내에 잔류하는 유해물질이나 세척을 위해 사용하는 유기용제 등에 직접 노출되었을 가능성도 높고, 이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PM 작업 시 아르신 등의 유해물질에 고농도로 노출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고 덧붙였다.

장우석 판사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2012년도 연구결과에서 삼성전자 등을 포함한 반도체사업장에서 측정된 유해물질의 농도가 작업환경 노출 허용기준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일정한 시기에 각 공정, 작업장소별로 일회성으로 측정하는 방식은 실제 작업환경의 측정결과로서 한계가 있다”며 “삼성전자를 포함한 반도체사업장에서 측정된 유해물질의 농도가 작업환경 노출 허용기준 미만이라는 연구결과가 존재한다는 사정만으로 이 사업장에서 발생된 유해물질이 망인에게 건강상 장애를 초래할 개연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짚었다.

또 “망인과 같이 웨이퍼 가공 정비 작업을 할 경우 극저주파 자기장에의 노출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난 점, 망인이 수시로 출입한 Sub-Fab(CSF, FSF)은 전력 공급 설비들이 밀집돼 있는 곳으로 위 공간에서 순간적으로 높은 극저주파 자기장이 발생해 망인이 이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점, 극저주파 자기장에의 노출이 높을수록 골수성 백혈병의 발병율이 높아진다는 다수의 연구결과가 보고된 점 등을 더해 보면, 망인에게 노출된 극저주파 전자기장과 백혈병 사이의 관련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고 봤다.

장우석 판사는 “또한 망인이 백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 유해물질이나 극저주파 자기장 등과 같은 유해요인들에 복합적으로 노출되었을 경우 각각의 유해요인들이 백혈병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 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우석 판사는 “망인은 사업장 재직 기간 대부분 교대근무를 하고 1주 평균 60시간 정도의 과로를 함으로써 피로가 누적되고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업무상의 과로나 스트레스가 망인의 면역력에 악영향을 미침으로써 면역력과 연관된 백혈병의 발병이나 진행을 촉진하는 원인의 하나로는 작용했을 것으로 추단함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서울행정법원
서울행정법원

◆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이러한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고려돼야”

근로복지공단은 신정범씨에 대한 업무관련성 조사를 실시하지 않은 채 ‘망인이 2014년 7월경부터 2016년 3월경까지 짧은 기간 근무해 백혈병을 일으킬 정도의 유해요인에 장기간 노출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유해인자 노출수준이 2011년 이전의 작업환경과 같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요양불승인 처분했다. 공단은 2011년을 전후해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에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봤던 것이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이 부분은 특히 주목할 판결이다.

장우석 판사는 “망인은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1년 8개월 동안 1일 8시간 이상 웨이퍼 공정라인에서 상시 근무했는데, 유해물질에 노출된 시간과 정도가 결코 짧다고 보기 어렵고,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2012년도 연구결과에 의해 반도체사업장에서 백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유해물질이 일부라도 검출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음에도, 망인이 근무한 기간의 작업환경에서 발생되는 유해물질, 노출 정도 등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려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만연히 망인의 작업환경이 2011년 이전의 작업환경보다 나아졌다는 것을 전제로 거부 처분했다”며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이러한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장우석 판사는 아울러 “망인은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근무하기 전에는 건강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백혈병과 관련된 유전적 소인, 병력이나 가족력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이 사업장에서 1년 8개월 동안 근무한 이후 우리나라의 평균 발병 연령 보다 훨씬 이른 시점인 만 31세 무렵 백혈병이 발병했다”고 말했다.

장우석 판사는 “삼성전자 사업장과 같은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근무한 근로자들에게 백혈병ㆍ림프종 등 림프조혈계 질환이 발생한 비율은 이러한 질환의 평균 발병률과 비교할 때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보인다”며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ㆍ림프종 등 림프조혈계 질환 발병률이 우리나라 전체 평균 발병률이나 망인과 유사한 연령대의 평균 발병률과 비교해 유달리 높다면, 이러한 사정 역시 망인의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데에 유리한 사정으로 참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은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임자운 변호사가 신정범씨의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해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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