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옥 변호인 “김재규 의사, 명예회복 역사 평가”…법원 ‘재심’ 결정
- 김재규 독대 유일한 변호인 강신옥 인권변호사 ‘영원히 정의의 편에’ 출간 - “강신옥 변호사는 종국에는 김재규의 명예가 회복될 것임을 믿으며, 역사의 평가를 일컫는 ‘제4심’을 예기하곤 했다”
[로리더] 대한민국 1세대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강신옥 변호사의 소망이 이뤄지는 것일까.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해 법원이 ‘재심’을 결정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첫 재판부터 결심공판까지 독대로 접견했던 유일한 변호인이었다. 숱한 접견과 재판 과정을 통해 지켜보며 김재규를 ‘민주화의 의인’이라고 평가하는 강신옥 변호사는 그래서 ‘내란 목적 살인’에서 적어도 ‘내란 목적’이란 죄명은 뺌으로써 김재규에게 최소한의 명예회복을 시켜줘야 한다는 소망이 있었다.
이에 강신옥 변호사는 종국에는 김재규의 명예가 회복될 것임을 믿으며, 역사의 평가를 일컫는 ‘제4심’을 예기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고등법원 제7형사부(이재권 송미경 김슬기 부장판사)는 2월 19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재심을 결정했다. 유족이 재심을 청구한 지 5년 만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총으로 쏴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대법원이 1980년 5월 20일 김재규에게 사형 선고를 확정했고,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됐다.
김재규 전 부장의 유족들은 2020년 5월 “재심 과정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도 당시 전두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김재규를 수사하면서 가혹행위를 인정할 수 있다고 봐 재심을 결정했다.
이런 가운데 이른바 10.26으로 체포된 김재규를 첫 재판부터 결심공판까지 독대로 접견했던 유일한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의 회고록 ‘영원히 정의의 편에’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은 강신옥 인권변호사의 파란만장한 삶과 혜안을 담았다. 그중 김재규를 변호하며 경험하고 느낀 부분을 상당 부분 할애해 담았는데, 그동안 알려진 인식과는 달리 김재규를 ‘의인(義人)’, ‘의사(義士)’로 호평했기 때문이다.
‘영원히 정의의 편에’ 저자는 “민간인 김재규가 일반 법원이 아닌 계엄 군법회의에서 재판받은 점, 정당한 방어권 기회를 박탈당한 점, 신군부에 의한 쪽지 재판 등 그동안 재심 사유가 많이 보강됐다”면서 “하루빨리 재심을 통해 ‘내란목적 살인’ 죄목 중 ‘내란목적’ 만큼은 빼는 것이 역사적ㆍ사법적 책무이자, 김재규의 명예를 최소한이나마 회복시켜 주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고 새빛 출판사는 전했다.
◆ 판사 출신 대한민국 1세대 인권변호사
◆ 저자 “검찰ㆍ경찰 수사 기록조차 순순히 인정하지 못하는 마당에, 전두환 합수부 수사기록은 왜 그렇게 신뢰하는지 참으로 의아할 따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강신옥 변호사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시절 부당한 인사에 항의하며 1963년 판사직을 사임했다. 이후 변호사로서 민청학련 사건과 10.26 사건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 여러 시국사건과 인권사건을 변호한 대표적인 1세대 인권변호사이자 정치인이었다.
강신옥 변호사는 2021년 7월 숙환으로 별세했다. 홍윤오 저자는 강 변호사의 사위인데, 장인의 추모하는 뜻에서 회고록 출간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재규에 대한 반감과 편견이 아직도 만연한 우리 사회 풍토에서 출판은 언감생심이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장인의 삶을 왜곡 폄훼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출판으로 꽃을 피웠다.
책 ‘영원히 정의의 편에’ 제목은 강신옥 변호사가 13대 국회의원 출마 당시 선거 포스터에 적은 글귀다. 저자인 사위가 생전에 장인 강신옥 변호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과 인터뷰 등을 토대로 집필했다.
홍윤오 저자는 “김재규를 주제로 한 스토리는 책이나 영화, 연재물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문제는 이것들 대부분이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기록을 뼈대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즉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려 욱하는 심정에 내란 목적으로 박정희를 시해한 패륜아’라는 기본 얼개의 한계와 영향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해 왔다”며 “검찰ㆍ경찰 수사 기록조차 순순히 인정하지 못하는 마당에, 전두환 합수부 수사기록은 왜 그렇게 신뢰하는지 참으로 의아할 따름”이라는 의구심을 나타냈다.
◆ 강신옥 변호사는 왜 김재규를 ‘의인’, ‘의사’라 생각했을까?
원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유신 시절로 따지면 오히려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였다고 한다. 강신옥 변호사는 시국사건과 인권사건을 변호하다 법정구속 등 4번 구속됐다. 이에 군부독재 정권의 희생자였음에도 민주화 보상금도 거부했다.
그런 강신옥 변호사가 사형 집행 전 김재규의 마지막 5개월을 직접 마주하고 내린 판단은 ‘김재규는 민주화의 의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란 목적 살인’에서 적어도 ‘내란 목적’이란 죄명은 뺌으로써 김재규에게 최소한의 명예회복을 시켜줘야 한다는 게 강신옥의 결론이었다.
강신옥 변호사는 “1979년 11월 29일부터 1980년 5월 15일까지 거의 매일 같이 김재규를 면회하면서 그와 접견한 내용을 기록했다. 나는 김재규를 면회하며, 그가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의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됐다”고 했다.
강 변호사는 “김재규가 의사(義士)라는 나의 심증은 면화를 하면 할수록 굳어졌다. 그를 접견하고 실망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며 “재판이 진행되며 김재규는 유신정권의 성격을 면밀하게 관찰하고서 이 체제를 그대로 방치하면 파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우려했음이 확실했다”고 말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가 의인(義人)인가’에 대해 김재규의 행동이 민주화에 공헌했는지를 따졌다. 강 변호사는 “결론적으로 10.26은 김재규가 계획한 단독 사건이고, 김재규가 아니었다면 유신정권이 철폐될 때까지 10.26 사건이 몇천 배, 몇만 배 희생이 뒤따랐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김재규가 궁정동에서 박정희를 쏜 197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기차역에서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강 변호사는 “김재규는 안중근 의사를 사표로 삼아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고 봤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것을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했다. 김재규는 “각하는 갈수록 애국심보다 집권욕이 강해졌다”고 고백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나는 김재규를 만나면서 박정희에 대한 그의 진정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며 “전두환 신군부는 10.26을 김재규와 차지철의 알력에 따른 우발적 사건으로 규정하며 김재규의 권력욕이 사건을 유발한 근본 동기라고 몰아갔다. 그들은 사건 직후부터 김재규의 비리를 날조해 언론에 흘리는 방법으로 그의 인격을 난도질했다”고 전두환 신군부를 지적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일각에서는 거사를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왜 그렇게밖에 못 했느냐는 식으로 김재규를 바보로 만들려고 시도했고, 김재규의 대중적 이미지는 재판도 시작되기 전에 만신창이가 돼가고 있었다”며 “그러나 김재규는 첫 만남에서부터 당당했다. 김재규의 의연한 모습에 조준희 변호사는 감격의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해 온 황인철, 홍성우, 조준희, 이돈명, 강신옥 변호사에게 김재규 변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가 의사(義士)라는 나의 심증은 면회를 하면 할수록 굳어졌다. 혹자들은 ‘박정희처럼 훌륭한 지도자를 왜 암살했냐’고 힐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욕보다 애국심이 약했다’라는 핵심을 찔렀음을 상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김재규의 입장은 1979년 11월 29일 면회 첫날부터 뚜렷했다. 김재규는 ‘유신의 심장을 야수의 심정으로 쐈다’라고 당당하게 진술했다. 그의 얘기는 사건의 핵심을 관통하는 결정판처럼 들렸다”고 회상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약칭 민주화심의위)는 2004년 찬성 3, 반대 7로 김재규의 민주화 운동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 바 있다.
하지만 강신옥 변호사는 “10.26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사건에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들 때문에 잠정적으로 미뤄졌을 뿐, 김재규가 의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다”고 확신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 재판이 진행되며 전두환 신군부가 퍼뜨린 음해들 가운데 하나는 ‘김재규가 구국의 결심으로 했으면, 그 직후 자결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억지 주장이었다”며 “‘김재규에게 정권을 잡을 욕심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모략성 의도가 깔린 악의적 험담”이라고 일축했다.
신군부의 주장에 대해 김재규는 “혁명을 결행한 마당에 쓰레기들이 더 남아 있어서 그걸 다 치우고 총을 주면 자결하겠다고 분노 섞인 결기를 토해냈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 대법원, 1980년 5월 20일 김재규 사형 확정
◆ 김재규,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 형장 이슬로
대법원은 1980년 5월 20일 김재규에게 사형 선고를 확정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서울 무교동 코오롱 빌딩 앞에서 보안사 기관원들에게 체포되고, 곧장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보름 동안 구금되며 실컷 구타를 맞았다”고 한다.
강신옥 변호사는 보안사의 조사 내용은 새로울 게 없고, ‘왜 김재규 구명을 선동하느냐’ 등의 추궁이 지루하게 되풀이돼 이어지며 매일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나는 1980년 5월 24일 서빙고 보안사 지하실에서 김재규와 박선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는 슬픈 소식을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비통한 심정으로 접하게 됐다. 김재규와 박선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신의 막을 내린 결정적 사건이 10.26이다. 그래서 10.26은 강신옥 변호사가 김재규를 변호하게 된 계기가 됐다. 강 변호사는 유신의 반대편에 서서 인권과 민주를 변호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첫 재판부터 결심공판까지 독대로 접견했던 유일한 변호인이었다고 한다. 1심 당시 김재규의 변호인은 21명이었으나, 1심이 끝난 후 김재규는 모든 사선 변호인단을 거부했다. 김재규는 이후 강신옥 한 사람과만 접견하겠다고 요구해 국선변호인과 강신옥 등 7명으로 변호인단이 새로 꾸려졌다.
강신옥은 김재규의 부관격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의 변호인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강신옥 변호사는 첫 재판부터 계속 법정에 나와 있었다. 강 변호사는 김재규와의 일대일 구치소 접견 기록을 대학노트 한 권에 꼼꼼히 남겼다. 저자는 “오랫동안 책상 서랍 안에서 머물러온 그 기록들이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이 책을 통해 드디어 세상에 본모습을 드러내게 됐으니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강신옥 변호사의 사위이자 저자는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의 명예가 종국에는 회복될 것임을 믿으며 역사의 평가를 일컫는 ‘제4심’을 예기하곤 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강신옥의 인생에는 3개의 굵고 선명한 점이 찍혀 있다”며 “첫 번째 점은 양심적 법조인, 두 번째 점은 민청학련 변호인, 세 번째 점은 어느 법조인도 원하지 않았을 김재규의 변호인”이라고 했다.
저자는 강신옥 변호사가 평소 법과 정의, 인권을 얘기하면서 자주 강조했던 말이 있다고 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기라 해도 정의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직을 기꺼이 걸 수 있는 의롭고 용감한 판사와 검사 5명만 있었다면 수백~수천 명의 무고한 학생과 억울한 시민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저자는 “이는 세상이 어떻게 요동칠지언정 사법부만은 마지막까지 깨어있고 살아 있으라는 강신옥의 간절한 호소이자 당부가 아닐까”라고 전했다.
◆ 강신옥 인권변호사 “구형 그대로 선고하는 것은 법을 빙자한 사법살인”
‘사법살인’이라는 용어는 종종 사용된다.
그런데 이 말은 강신옥 변호사가 1974년 민청학련 재판(유인태 전 민주당 의원 등) 최후변론에서 처음 언급했던 용어라고 한다. 당시 군법회의 재판에서 강신옥 변호사는 “법이 정치의 시녀, 권력의 시녀가 돼버렸다. 무고한 학생들에게 내란죄, 반공법 위반 등을 걸어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구형해 그대로 선고하는 것은 법을 빙자한 사법살인”이라는 취지의 구두변론을 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악법과 불의에 항거할 권리인 저항권을 역설하며 ‘기성세대 한 사람 변호인으로서 변호한다는 것이 차라리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것만 못한 심정’이라고 분노의 사자후를 토했다가 곧바로 법정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변호인이 피고인들의 최후진술도 못 듣는 희대의 ‘재판 쇼’가 벌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 이수성 “정의와 양심을 지켜온 귀감”
◆ 한인섭 “헌신적 변론한 전설적 법조인”
◆ 정해창 “용기와 열정 갖춘 정의의 사도”
◆ 김창국 “사법사 획 그은 진정한 사나이”
◆ 강신옥 변호사의 아들은 강한승 쿠팡 대표
강신옥 변호사의 친구인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영원히 정의의 편에’ 추천사에서 “강신옥은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강자에게 굴종하지 않고, 약자를 도와주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의 꿋꿋한 신념으로 정의와 양심을 지켜온 우리의 귀감”이라고 밝혔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강신옥 변호사는 민청학련 사건 등 모두가 꺼리는 사건을 주저 없이 맡아 헌신적인 변론을 한 전설적 법조인이다. 그는 ‘사법살인’의 재판에 항거하다 옥살이까지 했지만, 명문의 항소이유서ㆍ상고이유서를 통해 변론권 확립의 기념비를 세웠다”라고 평가했다.
정해창 전 법무부장관은 “강신옥은 참으로 용기와 열정을 갖춘 정의의 사도였다”고 호평했다.
서울법대 친구인 김창국 교수는 “강신옥은 착하고 가식이 없는 사람이다. 불의나 권력의 횡포, 약자를 보호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서는 의로운 사람이다. 무모한 권력에 당당히 맞서 대한민국 사법사에 큰 획을 그은 진정한 사나이다. 친구지만 존경한다”라고 추천사를 적었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는 정치인 강신옥의 여정, YS와 DJ와의 인연, 노무현, 정주영과 정몽준, 박근혜와의 일화, 신영복 사건 변호 등 한국 현대사를 수놓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돼 있다.
이 책은 강신옥 변호사의 차녀와 결혼한 홍윤오씨가 저자다. 홍씨는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국회 홍보기회관을 지냈다.
강신옥 변호사의 장남 강한승은 고려대 법대를 나와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하고, 청와대에서 법무비서관을 지냈다. 그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기업의 대표로 회사 경영을 하고 있는데, 바로 쿠팡이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