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 강신옥 ‘영원히 정의의 편에’…“판사ㆍ검사들 회사원처럼”

- “인권변호사 영광스러운 타이틀은 과분한 선물” - “용기 있는 판사ㆍ검사들은 아직도 찾아보기 힘들다. 법원과 검찰의 관료화 경향이 심화되고, 판사ㆍ검사들이 회사원처럼 돼버린 여파”

2025-02-07     신종철 기자

[로리더] 판사 출신으로 제1세대 인권변호사로 살며 ‘사법살인’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강신옥 변호사는 “사법부가 과거와 비교해 뚜렷하게 건강해졌다. 하지만 용기 있는 판사ㆍ검사들은 아직도 찾아보기 힘들다. 법원과 검찰의 관료화 경향이 심화되고, 판사ㆍ검사들이 회사원처럼 돼버린 여파”라고 분석했다.

“내가 사직한 이후로 젊은 판사들을 겨냥한 졸렬한 인사 보복 조치는 한동안은 모습을 감췄다. 내게 주어진 ‘인권변호사’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은 판사직을 그만둘 때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덕분에 받게 된 과분한 선물이었다” - 강신옥 변호사

서울지방법원 강신옥 판사는 1963년 11월 법복(法服)을 벗었다. 임관한 지 불과 1년 3개월 만이었다. 예비군 소집훈련을 받고 서울지방법원으로 돌아오니 경주지원으로 전보 발령이 나 있는데, 강신옥 판사는 “판사의 인사이동을 장기판의 졸병 옮기듯 하는 부당한 인사 발령에 순순히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법복을 벗었다”고 했다.

당시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시위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이 늘어나면서 젊은 법관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갖게 됐는데, 젊은 법관들을 손봐줘야겠다고 생각한 정권 수뇌부가 젊은 법관 2명을 시범사례로 삼아 지방으로 내쫓아버린 것이었다고 한다.

강신옥 변호사의 회고록 ‘영원히 정의의 편에’

대한민국 1세대 인권변호사인 판사 출신 강신옥 변호사의 파란만장한 삶과 혜안 넘치는 사상 및 철학을 그가 직접 육성으로 담은 회고록 ‘영원히 정의의 편에’가 출간돼 화제인데, 그의 소개는 이렇게 시작했다.

‘영원히 정의의 편에’(새빛 펴냄)는 강신옥 변호사의 사위이자 일간지 기자로 일해온 홍윤오 씨가 생전에 강신옥 변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들과 2015~2016년에 걸쳐 진행한 강신옥 변호사와의 인터뷰 및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서술했다.

1974년 7월 9일 육군본부 비상 보통군법회의 법정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결심공판에서 김지하, 유인태, 이철 등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다. 7명은 무기징역이 구형됐다. 이날 변호인으로 법정에 선 강신옥 변호사는 “고문으로 날조된 혐의임에도 검찰 구형은 무지막지했다”며, 이에 항의한 변론 내용이 문제가 돼 얼마 후 구속 기소됐다고 한다.

“법이 권력의 시녀, 정치의 시녀라고 단정하게 됐다”

“검사들이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을 구형하고 있다. 사법살인 행위다”

“변호인으로서 변호한다는 것이 차라리 피고인석에 석에 앉아 있는 것만 못한 심정이다”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좋다. 저항할 수 있다”

“악법에 저항한 학생들에게, 그 악법을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후일 문제가 될 것이다”

당시 법정에서 이렇게 항의한 강신옥 변호사는 “변호사가 법정 변론 때문에 처벌당한 어처구니없는 상황 탓에 단숨에 국제적으로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고 했다. 실제로 1974년 7월 19일자 뉴욕타임즈에서 1면과 2면에 걸쳐 비중있게 보도했다.

“민청학련 재판은 권력의 사법쇼”라고 일갈한 강신옥 변호사는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에 대해 “모순과 맹점으로 가득한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긴급조치 사건을 재판하는 법정은 법정이 아니었다. 권력의 꼭두각시놀음을 자처하는 한바탕의 연극 무대였다”고 쓴소리를 냈다.

‘정찰제’ 판결은 판사가 검찰 구형 그대로 선고하는 관행인데, 그 당시 이걸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판사들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민청학련 사건은 정찰제 판결이 날 가능성이 짚어 강신옥 변호사는 걱정이 컸다.

민청학력 결심공판에서 강신옥 변호사는 “지금 검사들은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내란죄, 국가보안법 위반,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는 법을 악용하여 저지르는 ‘사법살인’ 행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인 변호인으로서 변호한다는 것이 차라리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것만 못한 심정입니다”라고 변론했다.

지금 정치권, 언론계, 법조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사법살인’은 1974년 7월 9일 민청학련 재판 법정에서 강신옥 변호사가 변론에서 한 사자후다.

강신옥 변호사는 이날 재판이 끝날 무렵 중앙정보부 직원들에 의해 피고인 최후진술을 듣지 못하고 법정에서 반강제로 끌려 나왔다. 강신옥 변호사는 이날 대통령긴급조치 위반과 법정모욕 혐의로 구속됐다. 변호사 강신옥에서 졸지에 피고인 강신옥이 되고 말았다.

때문에 강신옥 변호사는 “이 재판이 순전히 쇼에 불과하다는 평가에 확실하게 인증도장을 찍어준 셈”이라고 확신하며 “변호인이 (법정에서) 끌려나가는 모습을 본 피고인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군사 정권이나 자행할 수 있는 폭력이고 만행이었다”고 분노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유신 시대의 대표적 인권탄압 사건인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서 “법이 정치의 시녀, 권력의 시녀가 되면, 법을 빙자한 사법살인 같은 일이 벌어진다”라면서 “악법에 항거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일은 인간 생명체의 자연스런 본능으로 해석돼야 된다. 인간의 저항권은 전인격적 판단과 양심의 발로”라는 말로 자연법으로서의 저항권을 강조했다.

판사 출신 강신옥 인권변호사는 그렇게 서대문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74년 9월 유신 검찰은 강신옥 피고인에게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의 중형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당시 1심에서는 99명, 2심에서는 125명의 매머드급 변호인단이 강신옥 변호사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구성됐다.

1988년 3월 강신옥 변호사는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강신옥 변호사는 “무죄 판결을 받으며 슈퍼스타가 됐다”며 “언론과의 각종 인터뷰는 물론이고, 주례 요청까지 쇄도하며 엄청난 조명을 받았다”고 했다. 강 변호사는 치솟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정치를 멀리했다.

정치는 일종의 종합예술로 변호사로 할 수 있는 일보다 정치가로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크고많다는 사실을 절감해 오던 강신옥 변호사는 YS(김영삼)의 삼고초려에 마침내 제13대 총선에 뛰어들며 정치인이 됐다.

하지만 강신옥 변호사는 “국회의원으로 생활한 8년의 세월을 돌아보면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다. 정치에 입문할 준비도 부족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체질적으로 현실정치와 맞지 않았던 탓”이라며 그리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정치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제한돼 있었다”고 평가했다.

강신옥 변호사의 회고록 ‘영원히 정의의 편에’

<정주영과의 만남>

강신옥 변호사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1992년 정몽준 국회의원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국민당 입당을 권유했는데, 강신옥 변호사는 “재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소신에 거절했다고 한다.

5공 비리 청문회 전에 정주영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강신옥 변호사는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은 청문회에서 “시류에 따라 돈을 줬다”고 답변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정주영의 솔직한 답변을 높이 평가했다.

노무현 전 국회의원에 대해 강신옥 변호사는 “깨끗하게 의정활동을 했다는 데는 어떠한 이견이 없다”고 호평했다. 강 변호사는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를 두 번 치렀지만 돈을 아주 적게 썼다”며 “나만큼 돈을 적게 쓴 사람은 노무현 정도가 전부였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는 정치인 강신옥의 여정, YS와 DJ와의 인연, 정주영과 정몽준, 박근혜와의 일화, 신영복 사건 변호 등 한국 현대사를 수놓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돼 있다.

1936년 경북 영주시에서 태어난 강신옥 변호사는 초중등학교 때는 늘 수석을 독차지했고, 수재들로 차고 넘치는 경북고에 들어갔다. 195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재학 중 고등고시 행정과(10회)와 사법과(11회)에 합격해 1962년부터 서울지방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했다.

정년 퇴임하는 날까지 판사를 하기로 결심했으나, 부당한 인사 발령에 대한 항의 표시로 법복을 벗은 강신옥 변호사는 “나는 인권변호사라는 타이틀로 불려 왔다. 내게는 너무나 과분한 호칭이다. 그러나 반가우면 반갑지 절대 꺼려지지 않는 브랜드가 인권변호사다”라고 자부심을 가졌다.

<서울대 법대는 ‘정의’라는 이름값을 하고 있는가>

강신옥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의 영혼을 이루는 정신의 고갱이는 ‘정의감’이다. 그렇지만 정신과 현실은 따로 놀기 일쑤였다. 그로 인해 서울대 법대 출신을 비롯한 우리나라 법조계 인사들 사이에 만연한 전관예우 관행은 만악의 근원처럼 인식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쓴소리를 냈다.

강신옥 변호사는 “정의와 부정을 분별하는 게 늘 복잡하고 헷갈리는 일만은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죄를 묻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서 죄를 묻지 않는다는 이 명백한 원칙을 확립하는데 일부러 어렵고 혼란스러운 환경을 조성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강신옥 변호사는 “재벌그룹 회장도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하고, 내로라하는 권력자들도 잘못을 범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법률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당연한 목소리에 울림이 크다.

강신옥 변호사의 회고록 ‘영원히 정의의 편에’

<권력 공장의 법 기술자들에게>

강신옥 변호사는 “법조계에 진출해 겪어보면 알게 된다. 법조인들 가운데 법을 국민과 나라에 봉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권력을 잡는데 필요한 동아줄로 간주하는 인사들의 비율이 얼마나 높은지를”이라고 짚었다.

그는 “판사 중에는 긴급조치 시절에 출세욕에 혈안이 돼 형량을 일부러 더 세게 때린 부류가 있었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억울한 처지를 염두에 둔다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며 “유신에 부역한 판사들은 ‘실정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강변하며 비겁하고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놨다”고 비판했다.

판사 출신 강신옥 변호사는 “불의에 맞서서 분연히 사직서를 제출하고 법복을 벗는 선배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후배가 그 뒤를 따른다”며 “그러면 불의한 세력이 법을 앞세워 판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강신옥 변호사는 사법부에 쓴소리를 냈다.

“사법부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해야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잘못했으면 한 사람이 반성해야 하고, 집단 전체가 잘못했으면 집단 전체가 반성해야 한다. 사법부 개혁은 이러한 시각에 따라 추진돼야 한다. 용기가 없었던 부끄러운 과거를 이런저런 이유를 구질구질하게 제시하며 에둘러 호도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강신옥 변호사는 “사법부가 과거와 비교해 뚜렷하게 건강해졌다. 사법부 독립도 신장됐고, 법조인들의 전문성도 제고됐다”면서도 “그렇지만 용기 있는 판사ㆍ검사들은 아직도 찾아보기 힘들다. 법원과 검찰의 관료화 경향이 심화되고, 판사ㆍ검사들이 회사원처럼 돼버린 여파로 분석된다”고 진단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냈다.

강신옥 변호사는 “검찰이 그동안 국민의 신뢰를 받아왔으면 검경 수사권 조정은 애당초 논란이 될 사안이 아니었다”며 “독점적 권한을 갖고서 수시로 허튼짓을 하니까 민심의 비판을 받는 것 아닌가? 잘한 일도 없으면서 자기 밥그릇부터 챙기려다 사달이 났다”고 꾸짖었다.

강신옥 변호사는 법조인들의 자세를 짚어줬다.

강 변호사는 “사법개혁이 정권의 이념적 성격과 상관없이 국가적 화두가 된 지 오래다. 나는 제도를 논하기 앞서서 법관과 검사들의 자세에 해한 문제 제기를 하고 싶다”며 “설령 제도적 개혁에 진척이 있어도 판사ㆍ검사들이 부패하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지적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아무리 세상이 복잡해지고 정의와 부정의 경계가 모호해져도,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국민의 열망과 염원은 절대 사그라지지 않는다”며 “불의한 사회나 부정한 국가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법조인의 몫”이라고 말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국민은 법에 대한 전문성은 다소 모자라도 상식적 법감정을 품고 있다. 법조인은 대표적 사회 지도층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항상 지킬 의무가 있다. 정의가 흔적조차 없이 실종될지도 모른다고 비관할 일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의의 불씨는 그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간직됐다”고 강조했다.

홍윤오 저자는 “강신옥의 인생에는 세 개의 굵고 선명한 점이 찍혀 있다. 첫 번째 점은 양심적 법조인으로서, 두 번째 점은 민청학련 변호인으로서, 세 번째 점은 어느 법조인도 원하지 않았을 김재의 변호인으로서”라고 짚으며 “본 회고록은 이 세 가지 굵직굵직한 점들에 관한 강신옥 본인의 육성 기록”이라고 소개했다.

저자는 “현직 대통령이 돌발적으로 선포한 비상계엄이 국회에 의해 해제되고, 대통령 자신이 내란죄 논란에 휩싸여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는 참당한 상황에까지 이르고 말았다”며 “혼란의 시대일수록 존경할 만한 어른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필자는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참다운 어른의 생생한 기록을 더 늦기 전에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게 사회적ㆍ역사적 책무라고 생각했다”고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