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형 “대법관 보수ㆍ진보 분류 부적절…정치영역을 법원 문 두드려”
김재형 “대법관 보수ㆍ진보 분류 부적절…정치영역을 법원 문 두드려”
  • 신종철 기자
  • 승인 2022.09.03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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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형 대법관 퇴임식 / 사진=대법원

[로리더] 김재형 대법관은 “입법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안인데도,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입법으로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를 사법부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국회를 지적했다.

2016년 9월 임명된 김재형(사법연수원 18기) 대법관은 6년 임기를 마치고 9월 2일 대법원 청사에게 퇴임식을 가졌다.

김재형 대법관은 “우리 사회는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법관을 보수 혹은 진보로 분류하여 어느 한쪽에 가두어 두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법관이 보수와 진보를 의식하게 되면 법이 무엇이고 정의는 무엇인지를 선언하는 데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형 대법관은 “대법원은 중요한 사건에 집중해 충분한 숙고를 거쳐 의미 있는 판결을 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대법원이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면서도 전원합의체와 공개변론을 더욱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대법원 구성원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상고심 제도의 개선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재형 대법관 퇴임식 

<다음은 김재형 대법관 퇴임사 전문>

존경하는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그리고 법원 구성원 여러분!

무더웠던 여름날도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대법관 임기를 마친 것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6년을 떠올려 보면, 법원 안팎으로, 나라 안팎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국정농단이나 사법농단 사태는 당시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고,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인의 삶과 행동 양식이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대법관 임무를 무탈하게 마치게 되어 기쁩니다. 제가 재판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6년 전 취임식을 한 첫날부터 재판연구관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읽으며 합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 직후에는 전원합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제 일상은 매달 두 차례 있는 소부 합의, 그리고 한 번씩 열리는 전원합의를 중심으로 반복되었습니다. 합의를 준비하고 판결문을 작성하여 판결을 선고하거나 각종 결정을 하는 패턴이 임기 내내 이어졌습니다. 퇴임 직전인 이번 주에도 전원합의체 판결과 소부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취임식이 있는 반나절만 즐겁고 그 이후로는 괴로운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재판을 하고 판결문을 쓰는 데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고자 했습니다.

대법관 임기를 시작하면서 작은 문제라도 처음부터 철저히 생각하고자 했습니다. 가급적 모든 것을 원점부터 새롭게 생각해 보려고 했습니다.

제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피하거나 미루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고자 했습니다. 사안의 실체를 직시하고 올바르게 판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접하여 판단을 해 나가는 과정 자체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인지라 항상 두려운 일입니다. 제가 쓴 판결이나 의견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고 판결로 내놓을지 거둬들일지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동료 대법관들과 의견을 나누며 조금씩 고쳐 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왔습니다.

입법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안인데도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입법으로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를 사법부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입법과 사법의 경계가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입법과 사법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입법과 사법은 정의라는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는 두 수레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국회의 입법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는 문제에 관하여 입법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국민들이 권리 구제를 받지 못하거나 불필요한 소송으로 이어져 사회적 낭비를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입법적 해결은 주로 장래에 일어날 일을 규율하기 위한 것이므로, 당사자들이 법원에 가져온 바로 그 문제까지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법률의 해석과 적용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법원이 해결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밝혀야 하겠지만, 저는 너무 쉽게 문제를 넘기지 않고 사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관해 힘닿는 데까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법학자로서 연구와 강의를 한 전공 분야는 민법입니다만, 대법관으로서 다룬 사건은 민사 사건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사건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미처 상상도 해 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건을 처리한 적도 있고, 그동안 법학자로서 연구하면서 익힌 지식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한 적도 있습니다. 법이 여러 전문 분야로 세분화되면서 개별 법영역이 독자성을 구축해 가고 있지만, 법의 뿌리와 근본원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법영역의 개별성이나 전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다른 법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발전을 외면해서는 안 되고 항상 전체 법질서의 통합성을 염두에 두고 재판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법관을 보수 혹은 진보로 분류하여 어느 한쪽에 가두어 두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법관이 보수와 진보를 의식하게 되면 법이 무엇이고 정의는 무엇인지를 선언하는 데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법관은 입법자가 선택한 법률 문언의 의미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입법목적을 비롯하여 법해석에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헌법을 비롯한 전체 법질서에 비추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고심해야 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중간도 아닙니다. 사법 적극주의와 사법 소극주의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법적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한 판결이 여러 의견을 검토하여 최선을 다해 내린 타당한 결론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판결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이나 체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바꾸어 나가고자 했습니다. 판결문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작성하여 법원이 판단하는 실질적 이유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당사자, 하급심 법관, 법학계와 실무계, 나아가 국민들과 깊고 폭넓게 소통하면서 법원의 재판 역량을 끌어올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계획을 세우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아진 점이 있었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재판연구관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한 시간은 한없이 즐거웠습니다. 뛰어난 역량과 자질을 갖춘 여러분의 도움으로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는 우리 대법원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작성한 보고서와 의견서를 매개로 대화를 하며 소통했던 경험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수정한 의견서를 보여 주며 여러분의 의견을 구하고 조금씩 나아져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열정과 패기, 그리고 감수성을 계속 간직해 주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법원 구성원 여러분!

우리 사회에서 대법원이 올바르게 재판을 하고 있는지에 관해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심리불속행 제도와 그 운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알고 있습니다. 전원합의체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중요한 사건에 집중하여 충분한 숙고를 거쳐 의미 있는 판결을 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법원이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면서도 전원합의체와 공개변론을 더욱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대법원 구성원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상고심 제도의 개선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법원이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토대로 상고심 제도가 개선되기를 기대합니다.

로마의 법학자인 켈수스는 “법은 선과 형평의 기술”이라고 했습니다. 법률가는 자신의 판단을 기다리는 사건을 주어진 틀에 맞추어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은 무엇이고 정의는 무엇인지, 선과 형평의 길은 어디에 있는지를 반추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에 법률가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는 원천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취임사에서 누구든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리는 사회를 구현하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을 약속했습니다. 제가 초심을 다잡으며 대법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도와주신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재판연구관과 대법관실 직원을 비롯하여 여러 법관과 직원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22. 9. 2.

대법관 김재형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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