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범 변호사(법무법인 민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김정범 변호사(법무법인 민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3권분립(三權分立)과 법관의 양심 - 김양호 판사의 탄핵청원에 부쳐>

지난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 34부(재판장 김양호 부장판사)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각하 판결을 내렸다. 전날에도 강제징용 피해자 85명이 일본제철 주식회사 등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각하 판결했었다.

재판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이 완전히 소멸된 것까지는 아니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 국가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를 제기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해석한 것이다. 재판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판결이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질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역효과 등도 이번 판결에 고려했다는 것이다.

위 판결은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지난 2018년 10월 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에 배치되는 것으로, 위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과 궤를 같이 한다.

​위 판결에 대하여 국민들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한 김양호 부장판사를 탄핵해야 한다’는 글을 올려 곧바로 20만명을 돌파해 정부가 공식적인 답변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물론 청와대는 판결을 이유로 법관을 탄핵할 권한이 없다. 탄핵의 절차는 국회가 일정한 요건과 절차에 따라서 탄핵발의를 하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재판을 하게 된다. 더욱이 위 판결이 법률에 위반되지 않는 이상 해당 판사가 탄핵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정서에 매우 동떨어진 판결을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판결일까? 판사들은 흔히 헌법 제103조의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결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한다.

여기서 권력분립과 관련된 법관의 양심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의 권력을 이야기할 때 흔히 3권분립(三權分立)을 거론한다. 국가권력의 작용을 입법ㆍ행정ㆍ사법의 세 분야로 나눠서, 각각 별개의 기관에 분담시켜 상호 간 견제와 균형을 다함으로써 국가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겠다는 대원칙이다.

보통 행정은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정책의 집행을, 입법부는 법률을 제정하는 역할을, 사법부는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국가의 형태에 따라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한 크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행정부와 입법부는 국민이 선출하는 형식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법부는 국민이 선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성을 하게 된다. 사법부가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기는 하지만 행정부와 입법부의 협의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이기 때문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갖게 된다.

​3권분립은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조직 원리로서 국가권력이 집중으로 인한 전횡(專橫)을 방지하기 위해서 마련된 제도다. 권력분립의 필요성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영국의 J.로크였는데, 그는 정치이론(政治二論: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90)에서 입법권과 집행권의 구별 및 분립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 후 프랑스의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1748)에서 입법ㆍ행정ㆍ사법의 3권분립을 주장하였다. 처음으로 3권분립을 받아들인 나라는 1787년 미국 연방헌법이었으며, 1791년 및 공화력(共和曆) 3년의 프랑스헌법 등이 이를 채택하였다. 영국은 대헌장(마그나카르타)ㆍ권리청원ㆍ권리장전 등으로 문서화되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대부분의 자유주의 국가들이 헌법적 원칙으로 받아들이면서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입법권은 국회에(헌법 제40조),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헌법 제66조 제4항),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헌법 제101조) 속한다고 규정하여 3권분립주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법부의 독립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헌법 제101조에서는 법관 법정주의를, 제103조에서는 법관의 독립된 심판권을, 제104조와 제105조에서는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구성과 임기를, 제106조에서는 법관의 신분보장을 규정해 사법권 독립의 내용을 헌법사항으로 하고 있으며 법원조직법에서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 사법부의 독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법관의 독립을 위한 수단이다. 법관의 독립 또한 국민의 인권보장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판결에 대한 비판이 가해질 때마다 판사들은 헌법 제103조를 들고 나온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규정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자신의 독립적 양심에 따라서 판결한 것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한다. 형식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판사들이 방패막이로 들먹거리는 헌법 제103조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자.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판사들이 말하는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헌법과 법률은 이미 우리 국민들이 알고 있는 헌법과 법률이다. 법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식견이 있는 국민이라면 충분히 이해하는 내용이다. 물론 그 제정형식은 이미 헌법과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다. 형식적 의미의 법률은 그 해석을 통해서 실체적인 법률로 구체화 된다.

법의 해석에 있어서도 판사의 개인적인 양심과 지식에 바탕을 둔다. 결국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은 판사의 주관적인 요소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주관적인 요소는 판사 개인의 주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보편화되고 객관화된 주관을 말한다.

​재판은 판사 개인의 경험이나 세계관을 펼쳐 보이는 자리가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소수의견을 지지하고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각자가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의견들에 대한 타당성을 여러 근거를 제시해 피력하면서 상대를 설득해 나가는 것이 토론과 학문의 장이라면 재판은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며, 판사 개인의 생각이나 주관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에 기초해서 판결을 하리라 기대를 하면서 재판에 임한다. 아무리 소수의견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근거를 분명히 해야 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대법원의 소수의견을 따르더라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에 의해서 내린 결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무용한 재판을 반복하게 만든다.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살다보면 나름대로 형성된 보편적 가치와 질서가 있다. 그런 가치와 질서는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자신이나 상대방의 언행이나 행동들을 예측하게 된다. 법원의 재판도 마찬가지다. 상급법원의 판결이 있고, 일반적이 법률해석의 원칙들이 있다.

법관이 생각하는 양심은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판사 자신의 개인적인 양심을 앞세워 판결을 하게 되면 재판을 받는 국민은 자신들이 갖는 예측가능성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만큼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판사의 양심이 결코 주관적인 양심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우리 헌법 제103조에서는 일본 헌법 제47조 제3항과 같은 내용이다. 즉, 'すべて裁判官は、その良心に従ひ独立してその職権を行ひ、この憲法及び法律にのみ拘束される(모든 재판관은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그 직권을 행사하며 이 헌법과 법률에만 구속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글은 법률가의 외부 기고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저작권자 © 로리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