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민유숙 대법관과 노정희 대법관은 8월 27일 “아동ㆍ청소년은 폭행ㆍ협박이나 위계ㆍ위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성행위에 응하는 경우가 있다”며 “설령 성행위에 동의한 듯이 보이더라도 착취적이고 학대적인 성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동ㆍ청소년을 위한 법적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동ㆍ청소년은 온전하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다.

법원에 따르면 30대 남성 A씨는 2014년 7월 스마트폰 채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알게 된 미성년자 B(당시 14세)양에게 자신을 ‘고등학교 2학년생 김OO’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하고 채팅을 통해 둘이 사귀기로 했다.

그런데 A씨는 김OO을 스토킹 하는 여성의 행세를 하며, B양에게 자신도 김OO을 좋아하는데, 김OO을 좋아하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도발했다.

또한 A씨는 김OO 행세를 하며 B양에게 “사실은 나(김OO)를 좋아해서 스토킹 하는 여성이 있는데, 나에게 집착해서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 우리 그냥 헤어질까”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나와 헤어지기 싫으면 그 여성의 요청대로 (네가) 나의 선배와 성관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OO은 “스토킹 하는 여성을 떼어내려면 나의 선배와 성관계를 해달라”는 부탁을 여러 차례 했다.

김OO(A)과 헤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B양은 선배를 만나 성관계를 하는데 동의했고, 이를 위해 새벽에 고속버스를 타고 김OO이 지정한 장소로 이동했다. A씨는 김OO 행세를 하며 간음했다.

피해자(B)는 이런 사실을 부모가 알게 될 것이 두려워 사건 발생 후 12일이 지나서야 상담센터의 도움을 받아 경찰에 신고했고, 그 후 부모와 떨어져 다른 도시의 청소년보호시설에서 생활했다.

검찰은 “A씨가 위계로 아동ㆍ청소년인 B양을 간음했다”며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위계 등 간음) 혐의로 기소했다.

1심과 2심은 무죄로 판단했다.

2심인 광주고등법원은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위계의 의미에 대해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일으킨 오인, 착각, 부지는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오인, 착각, 부지를 말하는 것이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에 관한 오인, 착각, 부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는 종래 대법원 판례의 판시에 따라 무죄로 판단했다.

이 사건의 쟁점은 A씨의 간음행위가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평가할 수 있는지 여부다.

‘위계’라 함은 행위자의 행위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게 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고, 대법관 12명 전원이 참여해 판단하는 전원합의체서 다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 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27일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상 위계 등 간음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 판단하라며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전원합의체는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일으킨 오인, 착각, 부지는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오인, 착각, 부지를 말하는 것이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에 관한 오인, 착각, 부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종전 판례인 대법원 판결 등은 이 판결과 배치되는 범위에서 변경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피고인의 부탁에 의한) 오인에 빠지지 않았다면 피고인과의 성행위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피해자가 오인한 상황은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성행위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이고, 이를 자발적이고 진지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따라서 피고인은 간음의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고 피해자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해 피해자를 간음한 것이므로 피고인의 간음행위는 위계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그럼에도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에는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며 “그러므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ㆍ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한다”고 밝혔다.

민유숙 대법관, 노정희 대법관
민유숙 대법관, 노정희 대법관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해 민유숙 대법관ㆍ노정희 대법관이 보충의견을 제시해 짚어본다.

두 대법관은 “성폭력범죄를 규율하는 형법, 성폭력처벌법, 청소년성보호법은 역동적으로 개정됐으며, 특히 폭행ㆍ협박에 이르지 않는 수단에 의한 성폭력범죄에서 처벌을 강화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확인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성폭력범죄를, 피해자의 항거를 불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ㆍ협박 즉 피해자의 의사가 완전히 제압될 수 있는 물리적 강제력을 수단으로 하는 것으로 상정했던 전통적 사고의 틀에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성폭력범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2018년 10월 16일자 형법 개정으로 업무ㆍ고용을 매개로 보호감독 하에 있는 사람을 위계 등으로 간음한 경우 법정형의 상한이 징역형 기준 종전의 5년에서 7년으로, 구금된 사람을 간음한 경우 법정형의 상한이 종전의 7년에서 10년으로 각 상향됐다.

또 성폭력처벌법은 같은 보호대상을 추행한 행위를 처벌하는데, 같은 일자 개정으로 법정형의 상한이 징역형 기준 종전의 2년 또는 3년에서 3년 또는 5년으로 상향됐다.

두 대법관은 “직장ㆍ조직 내부에서 의사결정권ㆍ업무수행지시권 등을 매개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권력형 성폭력사건이 피해자 개인은 물론 사회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침에도 이를 상대적으로 낮은 형으로 처벌할 수밖에 없어 부당했다는 취지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유숙ㆍ노정희 대법관은 “특히 주목할 만한 법 개정은 13세에서 15세 사이의 아동ㆍ청소년의 성을 보호하는 규정”이라며 “청소년성보호법의 2019년 1월 15일자 개정으로 19세 이상의 사람이 위 아동ㆍ청소년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간음ㆍ추행한 행위를 처벌하게 됐다가(청소년성보호법 제8조의2), 형법의 2020년 5월 19일자 개정으로 19세 이상의 사람이 13세에서 15세 사이의 아동ㆍ청소년을 간음ㆍ추행하면 수단의 강제성 유무 및 정도를 묻지 않고 처벌하게 됐다(형법 제305조 제2항)”고 설명했다.

두 대법관은 “이 사건 피해자(B)는 14세, 피고인은 36세이므로 위와 같은 개정법 하에서는 수단을 불문하고 처벌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민유숙ㆍ노정희 대법관은 “성개방과 성상품화 풍조가 만연하면서 사회문화적으로 아동ㆍ청소년에 대한 성착취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아동ㆍ청소년은 성행위 및 그 상대방을 선택하는 사회규범과 성행위의 상호반응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특히 “이들은 폭행ㆍ협박이나 위계ㆍ위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개입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성행위에 응하는 경우가 있고, 그 결과 자신을 착취하고 학대하며 해를 끼치는 성행위의 대상이 된다”며 “이들의 성적 관계맺기와 의사결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령 성행위에 동의한 듯이 보이더라도 착취적이고 학대적인 성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동ㆍ청소년을 위한 법적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대법관은 “성폭력피해자, 특히 아동ㆍ청소년 피해자는 성폭력피해를 당했음에도 자신이 비난받을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죄책감과 주변 사람에게 알려질 수도 있다는 걱정 및 자신이 당한 피해가 범죄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어렵고 신고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피해신고를 포기하는 일이 많은 것이 현실”이라고 짚었다.

또 “강제력 행사의 태양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외관상 성행위에 동의했다는 사정만으로 이들의 성적피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아동ㆍ청소년이 성매매에 나섰다가 오히려 이를 빌미로 협박 등을 당해 또 다른 성착취를 당하는 경우를 차단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민유숙ㆍ노정희 대법관은 “위 각 규정에는 이러한 형사정책적인 취지가 반영돼 있다. 이러한 규정은 성폭력범행에 취약한 피해자의 약한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결국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중대한 성폭력범죄에 해당한다는 규범적 판단과 맥을 같이 한다”며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입법은 16세 미만자가 성행위에 동의한 외관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쉽게 진정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로 볼 수 없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고 말했다.

두 대법관은 “따라서 16세 미만자의 성행위는 형식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를 존중한다는 측면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보호되어야 할 성이 침해됐는지 여부의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보충의견을 밝혔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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