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성인의 거짓말이나 꼬임에 속아 미성년자가 성관계에 동의한 경우에도 상대방을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이번에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오인, 착각, 부지의 대상을 확장하며 종전 판례를 변경했다. ‘위계’라 함은 행위자의 행위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게 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법원에 따르면 30대 남성 A씨는 2014년 7월 스마트폰 채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알게 된 미성년자 B(당시 14세)양에게 자신을 ‘고등학교 2학년생 김OO’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하고 채팅을 통해 둘이 사귀기로 했다.

그런데 A씨는 김OO을 스토킹 하는 여성의 행세를 하며, B양에게 자신도 김OO을 좋아하는데, 김OO을 좋아하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도발했다.

또한 A씨는 김OO 행세를 하며 B양에게 “사실은 나(김OO)를 좋아해서 스토킹 하는 여성이 있는데, 나에게 집착해서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 우리 그냥 헤어질까”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나와 헤어지기 싫으면 그 여성의 요청대로 (네가) 나의 선배와 성관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OO은 “스토킹 하는 여성을 떼어내려면 나의 선배와 성관계를 해달라”는 부탁을 여러 차례 했다.

김OO(A)과 헤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B양은 선배를 만나 성관계를 하는데 동의했고, 이를 위해 새벽에 고속버스를 타고 김OO이 지정한 장소로 이동했다. A씨는 김OO 행세를 하며 간음했다.

피해자(B)는 이런 사실을 부모가 알게 될 것이 두려워 사건 발생 후 12일이 지나서야 상담센터의 도움을 받아 경찰에 신고했고, 그 후 부모와 떨어져 다른 도시의 청소년보호시설에서 생활했다.

검찰은 “A씨가 위계로 아동ㆍ청소년인 B양을 간음했다”며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위계 등 간음) 혐의로 기소했다.

1심과 2심은 무죄로 판단했다.

2심인 광주고등법원은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위계의 의미에 대해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일으킨 오인, 착각, 부지는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오인, 착각, 부지를 말하는 것이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에 관한 오인, 착각, 부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는 종래 대법원 판례의 판시에 따라 무죄로 판단했다.

광주고법은 “피해자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에 관해 피고인에게 속았던 것뿐이므로 피고인의 간음행위는 형법 등에서 처벌대상으로 규정하는 위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고 봤다.

이 사건의 쟁점은 A씨의 간음행위가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평가할 수 있는지 여부다.

이 사건은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고, 대법관 12명 전원이 참여해 판단하는 전원합의체서 다뤘다.

대법원 청사
대법원 청사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 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27일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상 위계 등 간음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 판단하라며 유죄 취지로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아동ㆍ청소년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유는, 아동ㆍ청소년은 사회적ㆍ문화적 제약 등으로 아직 온전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지적ㆍ심리적ㆍ관계적 자원의 부족으로 타인의 성적 침해 또는 착취행위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라며 “또한 아동ㆍ청소년은 성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성 건강을 완성해가는 과정에 있으므로 아동ㆍ청소년에 대한 성적 침해 또는 착취행위는 아동ㆍ청소년이 성과 관련한 정신적ㆍ신체적 건강을 추구하고 자율적 인격을 형성ㆍ발전시키는데 심각하고 지속적인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따라서 아동ㆍ청소년이 외관상 성적 결정 또는 동의로 보이는 언동을 했더라도, 그것이 타인의 기망이나 왜곡된 신뢰관계의 이용에 의한 것이라면, 이를 아동ㆍ청소년의 온전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오인ㆍ착각ㆍ부지를 일으키고, 피해자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해 간음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위계와 간음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다만 “행위자의 위계적 언동이 존재했다는 사정만으로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므로 위계적 언동의 내용 중에 피해자가 성행위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동기를 이룰 만한 사정이 포함돼 있어 피해자의 자발적인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없었다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이와 같은 인과관계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피해자의 연령 및 행위자와의 관계,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 범행 당시와 전후의 상황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원합의체는 “한편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보호대상으로 삼는 아동ㆍ청소년, 미성년자, 심신미약자, 피보호자ㆍ피감독자, 장애인 등의 성적 자기결정 능력은 나이, 성장과정, 환경, 지능 내지 정신기능 장애의 정도 등에 따라 개인별로 차이가 있으므로 간음행위와 인과관계가 있는 위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범행 상황에 놓인 피해자의 입장과 관점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고, 일반적ㆍ평균적 판단능력을 갖춘 성인 또는 충분한 보호와 교육을 받은 또래의 시각에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그러면서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일으킨 오인, 착각, 부지는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오인, 착각, 부지를 말하는 것이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에 관한 오인, 착각, 부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종전 판례인 대법원 판결 등은 이 판결과 배치되는 범위에서 변경한다”고 판시했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14세에 불과한 아동ㆍ청소년인 피해자는 30대 피고인이 허구로 설정한 상황 속에서 상당기간 자극적인 내용의 도발과 부탁에 시달렸다”며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속아 자신이 김OO의 선배와 성관계를 하는 것만이 김OO을 스토킹 하는 여성을 떼어내고 김OO과 연인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오인해 김OO의 선배로 가장한 피고인과 성관계를 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위와 같은 오인에 빠지지 않았다면 피고인과의 성행위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피해자가 오인한 상황은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성행위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이고, 이를 자발적이고 진지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따라서 피고인은 간음의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고 피해자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해 피해자를 간음한 것이므로 이러한 피고인의 간음행위는 위계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그럼에도 원심은 이와 달리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했다”며 “이러한 원심판결에는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 이를 지적하는 검사의 상고이유 주장은 이유 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그러므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ㆍ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판결에 대해 대법원 공보관실은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오인, 착각, 부지의 대상을 간음행위 자체 내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는 다른 조건에 한정하지 않고 간음행위와 인과관계가 있는 대상으로 확정한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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