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최영애)는 피의자가 ‘변호인을 선임하겠다’고 명백히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호인 조력권의 보장을 위해 상당한 시간과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채 조사를 강행한 경찰의 행위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변호인 조력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인권위에 제출된 진정서에 따르면 A씨는 체포영장이 발부돼 지명수배 됐으며 2019년 5월 검거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경찰은 유치장 내 변호인 접견실에서 변호인 없이 A씨에 대한 1차 피의자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담당검사로부터 추가조사를 지휘 받아 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사무실로 이동해 2차 피의자신문을 실시했다.

A씨는 2차 피의자신문조사 초기 피의자의 권리고지를 받는 과정에서 진술거부권 및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행사한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경찰에게 국선변호인의 선임을 요청했다.

경찰은 피의자단계에서는 국선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음을 설명하자, A씨는 자신의 모친 및 누나에게 연락해 줄 것을 요청했고, 경찰은 A씨와 모친이 연락할 수 있도록 해준 후 피의사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A씨는 모친이 귀가한 후에도 모든 진술을 거부해 조사를 마무리했고, 이후 검사의 석방 지휘에 따라 이틀 뒤 석방됐다.

진정인 A씨는 “피의자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경찰이 진정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봉인된 소지품을 열람하고 복사했으며, ‘변호인을 선임한 후 진술하겠다’고 했음에도 이를 무시한 채 조사를 강행했다”라는 내용으로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담당 경찰관인 피진정인은 “추후 소지품을 확인한다고 진정인에게 고지한 후 소지품을 봉인했으며, 봉인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범죄혐의와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자료를 발견해 진정인의 동의를 구한 후 해당 자료를 복사해 피의자신문조서에 첨부했다”라고 주장했다.

변호사 선임에 대해서는 “진정인이 계속 변호인 선임 후 조사를 받겠다며 진술을 거부해서 진정인의 모친에게 연락해 주었다. 이후 모친이 도착할 때까지 진정인에 대한 피의자신문을 진행했는데, 이는 검사의 수사지휘 및 체포시한의 임박에 따른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국가인권위 조사 결과, 피진정인(경찰)은 진정인(A)을 피의자신문하며 진정인의 봉인된 개인소지품을 해제해 자료를 열람했고, 그 중 일부 서류를 확인한 후 복사해 조서에 첨부했다는 사실을 조서에 기재했다. 그러나 해당 내용에 진정인의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기재돼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또한 진정인은 피의자 신문 초기에 피진정인에게 진술거부권 및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행사한다는 의사를 밝히며 변호인 선임을 위해 자신의 모친에게 연락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피진정인은 진정인을 모친과 연락할 수 있도록 해줬을 뿐, 변호사를 선임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바로 진정인에 대한 피의사실 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인권위원회 침해구제제1위원회(위원장 박찬운)는 “수사기관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임의제출 명목의 강제적인 압수를 행할 우려가 있으므로, 제출에 임의성이 있다는 점에 관하여는 수사기관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증명해야 한다”고 봤다.

인권위는 또한 해당 사건에서 진정인이 임의제출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동의서 등 관련 자료가 없으므로 진정인이 해당 소지품을 임의로 제출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봐, 경찰관의 행위를 헌법 제12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적법절차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인권위는 현재 ‘범죄수사규칙’이 임의제출임을 입증할 자료의 작성과 관련해 폭넓은 재량사항과 한정적인 의무사항만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수사의 절차적 적법성에 대한 입증책임이 있는 수사기관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여지가 크다고 봐 임의제출에 대한 피조사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범죄수사규칙’에 관련 규정을 둘 것을 경찰청장에게 권고했다.

한편 인권위는 “형사소송법은 피의자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비준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변호인의 준비를 위하여 충분한 시간과 편의를 가질 것과 본인이 선임한 변호인과 연락을 취할 것’을 규정하고 있어, 진정인이 변호인 선임을 요청한 이상 국제규약에서 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경찰에게 변호사 선임을 위한 충분한 시간과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수사절차를 부당하게 지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사를 즉각 중단하고 변호인 선임을 위한 상당시간을 제공하는 등 관련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인권위는 “특히 우리나라 같이 아직까지 피의자에 대한 형사공공변호인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국가의 경우에는 피의자의 사선 변호인 선임 요청에 대한 절차적 권리 보장을 더욱 두텁게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는 경찰청장에게 수사기관이 수사과정에서 증거물 등을 임의제출 받은 경우 임의성이 침해되지 않도록 수사관을 대상으로 적법절차에 관한 직무교육을 실시하고, 임의제출에 대한 피조사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범죄수사규칙’에 관련규정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또 피의자가 조사과정에서 변호인을 선임하겠다고 의사를 표시한 경우 즉시 조사를 중단하고 변호인 조력권 보장을 위해 상당한 편의를 제공할 수 있도록 ‘범죄수사규칙’에 관련 규정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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