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경찰관이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할 때 ‘장문단답’의 신문내용을 ‘단문장답’으로 바꿔 실제 피의자의 진술과 달리 조서를 작성해 피의자의 방어권이 침해됐다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에 따르면 중학교 선후배인 A군 등 4명은 2010년 아파트에서 성폭행 범죄의 피의자로 입건됐다. 일부 소년들은 사법경찰관 제1회 피의자신문과정에서 범행을 자백했다.

구체적인 자백진술에 있어 소년들은 범행 일시, 장소, 범행 전 행적, 범행의 세부내용 등에 관해, 수사기관이 구체적으로 장문형식의 상세한 질문을 하면 단답형으로 답변했다.

그런데 사법경찰관은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면서 문답을 바꾸어, 마치 일부 소년들이 자발적으로 구체적인 진술을 한 것처럼 ‘단문장답’ 형식으로 기재했다.

이에 이후 소년들이 마음을 바꿔 모두 범행을 부인했다.

사법경찰관은 소년들에 대해 구속의견으로 품신했고, 검사의 구속영장 청구로 법원에서 영장이 발부돼 소년들은 구속됐다.

그러나 이후 검사가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 및 공범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소년들이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하자, 소년들 전부에 대해 ‘혐의 없음’ 처분하고 석방했다.

이렇게 한 달 가량 구속됐던 소년들과 보호자들은 2013년 대한민국을 상대로 진술증거 조작을 비롯해 수사과정 전반에 있어 적법절차 준수 및 수사원칙 위반 등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들은 “수사기관이 피의자신문조서 등 수사기록을 위법하게 작성해 법관으로 하여금 구속영장을 발부하게 해 신체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1심인 수원지방법원 제10민사부(재판장 설민수 부장판사)는 2014년 5월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해 원고 소년 4명에게는 1인당 300만원씩, 보호자들에게는 각 1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사법경찰관이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 작성과정에서 장문단답의 실제 신문내용을 단문장답으로 바꾸어 기재한 것은 조서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직무상 과실에 해당하고, 위 조서는 이후 영장실질심사 단계 및 검찰수사 과정에서 소년들의 피의자로서의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따라서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 소년들 및 보호자들에게 조서작성 과정에서의 직무상 과실에 따른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으로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도 1심의 판단을 유지했다. 이후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원고들은 “위자료 액수가 과소하다”는 주장과 함께, 자신들의 청구가 배척된 부분의 원심판단이 부당하다고 다투었다.

반면 국가는 “사법경찰관이 자백진술의 전체적인 취지 자체를 조작하지 않은 이상, 피의자신문조서는 녹취록과 다른 기능을 가진 것이고 소년들이 조서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서명ㆍ날인했던 점을 들어, 질문과 답변을 바꾸어 기재한 것만으로는 위법하다고 볼 수 없어 사법경찰관의 직무상 과실이 없다”고 다투었다.

대법원 청사
대법원 청사

대법원 제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지난 4월 29일 구속됐다 석방된 10대 청소년 4명과 보호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위자료 국가배상책임이 발생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은 수사 등 직무를 수행할 때에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공정하게 해야 하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의무가 있다”며 “특히 피의자가 소년 등 사회적 약자인 경우에는 수사과정에서 방어권행사에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세심하게 배려할 직무상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따라서 경찰관은 피의자의 진술을 조서화하는 과정에서 조서의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고의 또는 과실로 직무상 의무를 위반해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으로써 피의자의 방어권이 실질적으로 침해됐다고 인정된다면, 국가는 그로 인해 피의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위 법리에 비춰 원심의 위와 같은 판단을 수긍했다.

재판부는 “성폭력범죄는 통상 객관적인 물증이 부족해 진술증거가 중요한 사건에 해당하고, 제1회 피의자신문과정에서 자백한 경우 이후 범행을 번의해(마음을 바꿔) 부인하더라도 자백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며, 피의자가 성년에 이르지 못한 어린 학생 등 소년인 경우 더욱 방어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피의자들은 소년이고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했으나 사법경찰관이 피의자들에 대한 최초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에 있어 문답을 바꾸어 범행 전반에 관해 자발적이고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처럼 기재함으로써, 이후 소년들이 (검사) 수사과정에서 진술이 바뀐 이유를 납득시키고 부인진술의 신빙성이 자백진술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 등을 주장해 방어권을 행사하는 데에 불이익하게 작용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성폭력범죄의 특성과 진술증거 및 조서작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소년 피의자들에 대한 인권보호의무와 공정객관의무를 지는 수사기관이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에 있어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피의자방어권을 침해한 경우 그 자체로 국가배상책임이 발생하게 된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대법원 공보관실은 “경찰관이 범죄수사 등 직무를 수행할 때에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공정해야 하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법규상 또는 조리상의 의무가 있다는 종전의 법리를 재차 확인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성폭력범죄의 피의자가 소년 등 사회적 약자인 경우 수사과정에서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함에 있어 더욱 세심하게 배려할 직무상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반한 경우 국가배상책임이 발생함을 명확히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저작권자 © 로리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