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공무원의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에만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국가배상법 조항은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왔다.

헌법재판소는 3월 26일 과거 긴급조치 제1호 또는 제9호 사건으로 수사 및 재판을 받은 A씨 등이 국가배상법 제2조(배상책임) 1항에 대해 낸 헌법소원 심판사건에서 재판관 5(합헌) 대 3(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헌법소원 청구인들은 긴급조치 제1호 또는 제9호 위반으로 수사 또는 재판을 받은 당자자 및 가족이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2013년 3월 21일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위헌 결정했다.

이에 청구인들은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 근거해 국가를 상대로 긴급조치의 발령 및 이에 따른 수사와 재판, 그 과정에서의 수사기관의 가혹행위 등으로 인한 불법행위를 이유로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를 제기했다.

대법원은 2014년 10월 27일 판결( 2013다217962)에서 수사기관의 폭행 등 가혹행위, 위법한 증거에 인한 유죄판결 선고 등의 사정이 있는 경우 이를 원인으로 한 국가배상청구를 일부 인용하는 경우 외에는, 당시 시행 중이던 긴급조치에 의해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ㆍ구금해 수사를 진행하고 공소를 제기한 수사기관의 직무행위나 긴급조치를 적용해 유죄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헌법소원 청구인들은 소송 계속 중,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본문 중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하여’ 부분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했으나 기각 또는 각하되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

헌재는 법정의견에서 “과거에 행해진 법집행 행위로 인해 사후에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면, 국가가 법집행행위 자체를 꺼리는 등 소극적 행정으로 일관하거나, 행정의 혼란을 초래해 국가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헌재는 “국가의 행위로 인한 모든 손해가 이 조항으로 구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긴급조치 제1호 또는 제9호로 인한 손해의 특수성과 구제 필요성 등을 고려할 때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 여부를 떠나 국가가 더욱 폭넓은 배상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이는 국가배상책임의 일반적 요건을 규정한 심판대상조항이 아니라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입법자가 별도의 입법을 통해 구제하면 된다”고 짚었다.

헌재는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심판대상조항이 헌법상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헌법재판소의 선례는 여전히 타당하고, 이 사건에서 선례를 변경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 김기영, 문형배, 이미선 재판관 위헌 반대의견

반면 이 심판대상조항에 대한 김기영, 문형배, 이미선 재판관은 위헌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세 재판관은 “긴급조치 제1호, 제9호의 발령ㆍ적용ㆍ집행을 통한 국가의 의도적ㆍ적극적 불법행위는 우리 헌법의 근본이념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정면으로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국가의 본질을 거스르는 행위이므로 불법의 정도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또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법행위를 직접 실행한 공무원은 국가가 교체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한 지위에 있었으며, 그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 역시 이례적으로 중대하다”며 “따라서 심판대상조항 중 위와 같이 특수하고 이례적인 불법행위에 관한 부분의 위헌 여부는 이 사건에서 별개로 다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 재판관은 “국가배상청구권에 관한 법률조항이 지나치게 불합리해 국가배상청구를 현저히 곤란하게 만들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면, 이는 헌법에 위반된다”며 “심판대상조항은 긴급조치 제1호, 제9호에 관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개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요구한 결과, 이에 관해서는 국가배상청구가 현저히 어렵게 됐다”고 봤다.

재판관들은 “이로써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배상청구에 관한 법률조항이 오히려 법치주의에 큰 공백을 허용했음은 물론이고,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에 관한 헌법에도 위반되는 불합리한 결과가 빚어졌다”고 짚었다.

이어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불법성이 더 큰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오히려 국가배상청구가 어려워졌고,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피해를 외면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며 “이로써 국가배상청구권에 관한 법률조항이 오히려 국가배상제도의 본래의 취지인 손해의 공평한 분담과 사회공동체의 배분적 정의 실현에 반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세 재판관은 “법정의견이 합헌의 근거로 드는 공무원에 대한 제재기능과 불법행위의 억제기능은 국가가 개별 공무원의 불법행위 실행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상태에서 벌어진 경우에는 설득력이 떨어지고, 국가배상제도를 헌법으로 보장한 정신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봤다.

재판관들은 “그러므로 심판대상조항 중 ‘긴급조치 제1호, 제9호의 발령ㆍ적용ㆍ집행을 통한 국가의 의도적ㆍ적극적 불법행위에 관한 부분’은 지나치게 불합리해 국가배상청구를 현저히 곤란하게 만들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다”며 “따라서 심판대상조항 중 위와 같이 예외적인 부분은 청구인들의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해 헌법에 위반된다”는 위헌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 이 사건은 헌법재판소가 2015년 4월 30일 결정(2013헌바395)에서는 문제되지 않았던,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이 긴급조치 제1호 또는 제9호로 수사 또는 재판을 받은 자들의 국가배상청구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이라는 요건을 유지함으로써 헌법상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된 최초의 사안이다.

헌법재판소는 관계자는 “헌재가 이 결정을 통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사와 재판을 받은 경우에 대한 국가배상청구라 하더라도 심판대상조항이 고의 또는 과실 요건을 두는 것은 청구인들의 헌법상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헌재는 “다만, 긴급조치가 집행될 당시 법률의 위헌성을 유효하게 다툴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헌법상 용인되기 어려운 규범인 긴급조치 제1호, 제9호의 집행에 의한 중대한 인권 침해라는 손해의 특수성 등을 고려해 구제의 필요성이 있다면 입법자가 별도의 배상을 명하는 입법을 할 수 있음을 명시했다”고 전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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