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교육청이 초등학교 원어민 영어보조교사에게 에이즈(HIV) 검사결과를 요구한 것은 위법하므로 국가에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판결문에 따르면 뉴질랜드 국적의 A씨는 2008년 8월 한국에 입국했다. 며칠 뒤 B교육청에서 1년간 원어민 영어보조교사 고용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다음날 A씨는 병원에서 에이즈 검사, 마약반응검사 등 건강검진을 받고 결과를 제출했다. A씨는 그 무렵 모 초등학교에서 원어민 영어보조교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2009년 4월 A씨는 초등학교를 통해 재계약 희망 의사를 밝혔다. 그 무렵 실시된 교장과 동료 교사들의 평가점수도 괜찮았다.

그런데 교육감은 지침에 따라 2009년 5월 A씨에 대해 에이즈 검사를 포함한 건강검진 결과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다수의 원어민 영어보조교사들이 에이즈에 감염되고, 마약거래를 하다가 적발되는 등 사회적 물의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교육부는 2009년도 지침을 통해 HIV 및 마약검사를 포함한 신체검사서를 요구해 원어민 영어보조교사의 적격 여부를 엄격하게 심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A씨는 교육감의 건강검진 수검 요구가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 조치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교육감은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면 재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건강검진 결과를 제출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 A씨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교육감은 2009년 6월 A씨를 재계약 검토 대상에서 제외했고, 그 결과 재계약이 체결되지 않았다. A씨는 2009년 9월 대한민국을 출국했다.

A씨는 “2009년 재계약 논의 과정에서 HIV 검사 결과가 포함된 건강검진 결과의 제출을 요구한 것은 평등권, 근로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및 사생활비밀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규약), 경제적ㆍ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규약),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인종차별철폐협약) 등을 위반한 위법행위”라고 주장했다.

A씨는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로 인해 근무성적이 좋았음에도 재계약을 하지 못해 1년간 영어 원어민 보조교사로 근무하지 못하고,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며 “따라서 정부는 1년간의 영어 원어민 보조교사 급여에 상당한 2400만원과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600만원 등 합계 3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소송을 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35단독 김국식 판사는 지난 10월 29일 뉴질랜드 국적의 A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2018가단5125207)에서 “국가가 A씨에게 3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김국식 판사는 “해당 교육감은 2009년 5월 구 에이즈예방법 시행령에 따른 에이즈 검진 대상자에 해당되지도 않는 원고에 대해서 에이즈 검진 결과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며 “이는 그 자체로 에이즈예방법에 위반되는 행위이거나 감염인 또는 감염인으로 오해받아 불이익을 입을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한 보호의무를 저버린, 위법성이 농후한 행위로서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교육청 소속 담당 공무원은 교육부가 마련한 행정규칙인 2009년도 지침에 따라 A씨에 대해 HIV 검사, 마약 검사가 포함된 신체검사를 요구했으므로 위법성 또는 공무원의 과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국식 판사는 “설령 국립국제교육원이 만든 2009년도 지침이 행정규칙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이는 구 에이즈예방법에 위배되는 행위로서 무효”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는 “원어민 영어보조교사들은 미성년자인 학생들과 교육현장에서 직접 긴밀하게 접촉 교류하므로, 이들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통해 학생들의 안전권을 확보할 공익적 필요성이 존재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원어민 영어보조교사들은 국내 교사들과 달리 주로 해외에서 생활해 한국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로 교육현장에 곧바로 투입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자격 검증이 필요하고, 따라서 이들을 국내교사와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며 “원어민 영어보조교사인 원고에 대해 엄격한 신체검사를 요구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거나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국식 판사는 “원고를 포함한 원어민 영어보조교사에 대해 HIV 검사나 마약 검사를 실시하려는 정책의 목적은 일응 정당하다”면서도 “그러나 이 요구는 위법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정부의 소멸시효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판사는 “피고나 해당 교육청은 2010년부터 더 이상 원어민 영어보조교사들에 대해 HIV 검사 결과를 요구하지 않았는바, 피고 스스로 이미 이 요구에 부당한 점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그럼에도 피고는 원고의 조치에 대해 다투기만 할 뿐 현재까지도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러한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해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다”며 “따라서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손해배상범위에 대해 김국식 판사는 “원고는 교육감의 계약 갱신 의사, 원고의 근무 성적 등에 비추어 2009년 교육청과 고용계약을 갱신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런데 원고는 공무원들의 위법한 요구로 인해 계약 갱신을 하지 못하게 됐고, 그 결과 그에 따른 급여 2400만원을 얻지 못하는 손해를 입었다”며 “그리고 원고가 그 과정에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도 인정할 수 있어 위법성 정도 등에 비추어 위자료는 원고가 구하는 600만원으로 정함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김 판사는 “따라서 피고는 원고에게 합계 3000만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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