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1948년 ‘여순사건’(여수ㆍ순천 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내란죄 등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 대법원이 첫 재심개시결정을 확정했다. 무려 71년만이다.

이른바 여순사건(여수ㆍ순천 사건)은 1948년 10월 여수 주둔 14연대가 제주 4ㆍ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며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 그러나 정부의 진압군은 반란군을 진압하며 여수와 순천을 탈환했다. 진압군의 진압 과정에서 반란군과 무관한 민간인 상당수가 희생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진압 이후에도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이 비공개 군법회의를 통해 계속됐다.

국군은 민간인들에게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씌워 불법 체포해 군사재판에 넘겼다. 광주호남계엄지구사령부 호남계엄지구고등군법회의는 1948년 11월 14일 민간인 A씨 등에 대해 내란죄, 국권문란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고, 곧바로 사형이 집행됐다.

현재까지 당시 수사 절차나 구체적인 범죄의 증거, 판결문 등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당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피고인들을 희생자로 확인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이에 유족들이 2013년 법원에 “희생자들을 연행한 경찰 등이 구속영장 없이 불법 체포ㆍ감금했으므로, 형사소송법의 재심사유가 있어 재심을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1심인 광주지방법 순천지원은 “당시 판결문에 구체적인 범죄사실의 내용과 증거가 기재되지 않았고, 순천 탈환 후 불과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돼 곧바로 집행된 점 등에 비춰보면 A씨 등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이 없이 체포ㆍ구속됐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검사가 “체포ㆍ구속에 불법수사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항고했으나, 2심인 광주고등법원은 “피고인들이 불법으로 체포ㆍ구속됐다”며 1심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자 검사가 “재심사유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대법원의 판단을 받기 위해 재항고 한 사건이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 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1일 여순사건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돼 사망한 피고인들에 대한 재심청구 사건(2015모2229)에서 “재심사유가 있다고 인정한 원심 결정에 위법이 없다”고 판단해 재심개시를 확정했다.

대법관 다수의견(9명)은 “재심사유를 인정하고 재심대상판결의 존재를 인정한 원심의 판단이 모두 정당하므로 재항고는 이유 없다”며 검사의 재항고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여순사건 당시 군경에 의해 반란 가담ㆍ협조 혐의로 체포돼 감금됐다가 내란죄, 국권문란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유죄판결을 받았고, 피고인들을 체포ㆍ감금한 군경이 법원으로부터 구속영장 발부 없이 불법 체포ㆍ감금했다’고 인정한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검사의 재항고 이유는 아니지만, 박상옥ㆍ이기택 대법관은 당시 판결문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고, 재심은 가능하지 않으며 타당하지도 않다는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두 대법관은 “이 사건 재판이 실제로 있었는지, 피고인들이 사형판결의 집행으로 사망한 것이 사실인지 의문이며, 설령 재판이 있었다고 보더라도 절차적 하자가 매우 중대해 규범적 의미에서는 재판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재심대상판결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현재 공소사실을 알 수 없는 이상 형사재판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재심도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법원 청사
대법원 청사

하지만 전원재판부는 “형사재판에서 심증형성은 반드시 직접증거로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간접증거로 할 수도 있다”며 “기록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군ㆍ경에 의한 민간인들에 대한 체포ㆍ감금이 일정한 심사나 조사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피고인들의 연행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도 이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판결서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판결서가 판결 그 자체인 것은 아니므로 판결서가 작성되지 않았거나 작성된 후 멸실되었더라도 판결이 선고된 이상 판결은 성립한 것이고, ‘유죄 확정판결’인 이상 재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이 선고되고 확정돼 집행된 사실은 판결의 내용과 피고인들의 이름 등이 기재된 판결집행명령서와 당시의 언론보도 내용으로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여순사건 당시 선포된 계엄령과 그 계엄령 선포에 따라 설치된 군법회의에 대해 위헌ㆍ위법 논란이 있으나 국가공권력에 의한 사법작용으로서 군법회의를 통해 판결이 선고된 이상 판결이 당연무효가 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판결의 성립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과 관련해 대법원 관계자는 “여순사건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판결이 확정돼 사형이 집행된 피고인들에 대해 재심개시결정을 확정한 최초의 사례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이번 대법원의 재심개시결정으로 A씨 등 희생자들에 대한 재심 재판은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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