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즉 사법농단 의혹이 세상에 드러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탄희(42, 사법연수원 34기) 수원지법 안양지원 판사가 법원에 사직서를 냈다.

29일 이탄희 판사는 법원 내부통신망인 코트넷에 ‘판사 이탄희, 내려놓는 글’이라는 입장문을 올리고 정기인사를 앞둔 1월초에 사직서를 제출한 사실을 공개하며, 사법농단과 법복을 벗는 소회를 밝혔다.

참여연대 의인상을 수상한 이탄희 판사(사진=참여연대)
참여연대 의인상을 수상한 이탄희 판사(사진=참여연대)

‘회복과 재충전이 필요한 것 같다’는 이탄희 판사는 “처음부터 정의로운 판사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된 이상은 가장 좋은 판사가 되고 싶었다. 소명의식을 가진 판사가 되고 싶었다. 이상이 있는 판사이고 싶었다. 그래서 선배들의 좋은 모습만 닮으려고 노력했다. 후배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었다”며 “소속감을 주는 건전한 법관사회가 제 주위엔 분명히 있었다”고 밝혔다.

양승태 코트(SCOURT)의 사법농단에 대해 이 판사는 “지난 시절 행정처를 중심으로 벌어진 헌법에 반하는 행위들은 건전한 법관사회의 가치와 양식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질타하며 “법관이 추종해야 할 것은 사적인 관계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가치다. 가치에 대한 충심이 공직자로서의 명예”라고 사법농단에 가담한 법관들을 일갈했다.

이탄희 판사는 “판사가 누리는 권위는 독립기관으로서의 권위”라며 “조직원으로 전락한 판사를 세상은 존경해주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대로, 성운처럼 흩어진 채로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며 “미래의 모든 판사들이 독립기관으로서의 실질을 찾아가길 기원한다”고 당부했다.

이 판사는 “우리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2년간 배운 것이 많다. 한번 금이 간 것은 반드시 깨어지게 돼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인생은 버린 사람이 항상 이긴다는 것을 배웠다”며 “하루라도 먼저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저도 무엇을 하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끝으로 “그동안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신 너무나 많은 분들, 그 한분 한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최소한 밖에 하지 못하고 일어나게 되어 미안합니다”라고 마무리했다.

이탄희 판사는 2017년 2월 9일 판사들에게는 승진을 위한 엘리트 코스로 알려진 법원행정처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2월 20일자)을 받았다. 그런데 이 판사는 2월 14일 대법원 간부로부터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는 소위 사법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듣게 됐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이 판사는 2017년 2월 16일 인사제1심의관과 기획조정실장에게 전화로 사직의 뜻을 전하고, 원 소속인 안양지원에 출근해 지원장에도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판사는 당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과의 통화에서 사직 대신 안양지원에 돌아가 재판을 하겠다고 밝히며, 국제인권법연구회 개입을 중단할 것으로 요구했다. 결국 이 판사의 뜻대로 안양지원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법원 내부통신망에 인사발령문이 올라오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탄희 판사가 윗선의 판사 사찰 업무 지시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한 사건이 언론을 통해 외부로 알려지면서 ‘사법부 블랙리스트’ 작성 문건 의혹으로 번지고,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법농단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참여연대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업무 거부와 사직서 제출로 사법농단 실체를 드러내는 계기를 연 이탄희 판사를 ‘2018 참여연대 의인상’으로 선정해 시상했다.

한편, 사법농단의 최정점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 24일 구속됐고, 사법농단의 핵심 실무 책임자로 지목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작년 10월 27일 구속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이다.

<다음은 ‘판사 이탄희, 내려놓는 글’ 전문>

존경하는 모든 판사님들께

무엇보다, 오랜 기간 동안 전화와 메일 등으로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께 먼저 터놓고 상의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1월 초에 이미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말씀을 드릴 수 없어 마음 앓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 처지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번 정기인사 때 내려놓자고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저에게는 회복과 재충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년이 길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쯤 다시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다시 1년을 겪었습니다. 2년간 유예되었던 사직서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련도 두려움도 줄어서 좋습니다.

처음부터 정의로운 판사를 꿈꿨던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저만의 지기 싫은 마음으로 판사가 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된 이상은 가장 좋은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랬듯이 단 하나의 내 직업, 그에 걸맞은 소명의식을 가진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상이 있는 판사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의 좋은 모습만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럴수록 선배들도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었습니다. 소속감을 주는 건전한 법관사회가 제 주위엔 분명히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 행정처를 중심으로 벌어진 헌법에 반하는 행위들은 건전한 법관사회의 가치와 양식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법관이 추종해야 할 것은 사적인 관계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가치입니다. 가치에 대한 충심이 공직자로서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가치에 대한 배신은 거부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물러서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좋은 선택을 한 뒤에는 다시 그 선택을 지켜내는 길고 고단한 과정이 뒤따른다는 것을,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끝없는 노력과 희생을 요한다는 것을, 그때는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한때는 ‘법원 자체조사가 좀 제대로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단 하루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시작만 혼자였을 뿐 많은 판사님들 덕분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모든 분들이 자기의 뜻을 세워 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또 제 입장에서는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드러난 결과는 씁쓸하지만, 과정을 만든 한분 한분은 모두 존경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판사가 누리는 권위는 독립기관으로서의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원으로 전락한 판사를 세상은 존경해주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성운처럼 흩어진 채로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모든 판사들이 독립기관으로서의 실질을 찾아가길 기원합니다. 제 경험으론, 외형과 실질이 다르면 단단해지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더 큰 공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2년간 배운 것이 많습니다. 한번 금이 간 것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인생은 버린 사람이 항상 이긴다는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깨진 유리는 쥘수록 더 아픕니다. 하루라도 먼저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무엇을 하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겠습니다. 저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동안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신 너무나 많은 분들, 그 한분 한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최소한 밖에 하지 못하고 일어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시 뵐 때까지 항상 건강하세요.

- 판사 이탄희 올림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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