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제주4ㆍ3사건 억울한 옥살이 수형인 공소기각…70년만 재심 무죄
법원, 제주4ㆍ3사건 억울한 옥살이 수형인 공소기각…70년만 재심 무죄
  • 신종철 기자
  • 승인 2019.01.2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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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더] 군ㆍ경 공권력에 의해 육지로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4ㆍ3 생존 수형인 18명이 재심을 청구해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임창의(여, 99) 할머니 등은 제주 4ㆍ3사건이 진행 중이던 1948년 가을경부터 1949년 7월경 사이에 군ㆍ경에 의해 당시 제주도 내에 설치된 수용시설 등에 구금돼 있다가 1949년 7월에 이르기까지 육지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돼 수형인 신분으로 교도소에 구금돼 있었다.

이번에 재심 법정에 선 18명은 1948∼1949년 내란죄 등 누명을 쓰고 징역 1년에서 최대 20년 형을 선고받아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제주4ㆍ3사건이라 함은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정의한 바에 따라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과 당시 나이, 직업, 본적지, 항변 및 판정(判定), 언도(言渡)일자, 형량 및 수감교도소가 대상자별로 각 하나의 열(列)로 기재돼 있는 “단기 4281년 12월. 단기 4282년 7월(군법회의분) 수형인명부”에 터 잡아, 2017년 4월 법원에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만든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다.

이 사건은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 등 당시 피고인들에 대해 유죄의 판결이 있었음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제주지방법원은 2018년 9월 3일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내용들 및 피고인들의 진술 내용, 일부 피고인들에 대한 수형 관련 자료와 제주 4ㆍ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등의 관련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피고인들이 육지로 이송돼 교도소에 구금된 것은 피고인들에게 각 죄목에 따른 법령을 적용해 수형인명부에 기재돼 있는 형벌을 부과하기로 하는 사법기관(군법회의)의 유권적 판단이 근거가 됐던 것이라 볼 수밖에 없어 재심이유가 존재한다”며 재심개시결정을 하고, 그 무렵 확정됐다.

제주지방법원(사진=홈페이지)

재심을 맡은 제주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제갈창 부장판사)는 1월 17일 내란실행, 국방경비법위반 등으로 구금됐던 임창의 할머니 등 제주4ㆍ3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이른바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를 기각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공소기각이란 형사소송에서 법원이 소송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 경우, 실체적 심리를 하지 않고 소송을 종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경우, 수형(受刑) 관련 문서 등에 피고인들의 죄명과 적용법조만이 기재돼 있을 뿐, 달리 공소장이나 소송기록 내지 판결문 등 피고인들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공소사실로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인지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들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공소사실로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인지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이상,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은 특정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법정에서도 일관해 ‘자신들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범죄사실로 재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고, 일부 피고인들을 포함해 당시 군법회의의 판단에 따라 육지로 이송돼 수형인의 신분으로 교도소에 구금된 사람들의 경험에 관한 진술을 담은 채록집이나, 피고인들이 재심청구에 즈음해 작성한 진술서 내지 법정에서의 진술 어디에도 ‘예심조사’ 내지 ‘기소장 등본의 송달’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으며, 피고인들의 재심청구 이후 법원의 자료수집 및 사실조사 과정에서도 당시 피고인들에 대해 예심조사관에 의한 예심조사와 기소장 등본의 송달을 통한 기소사실의 통고가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을 만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 기재 군법회의의 경우 1948년 12월 3일부터 같은 달 27일까지 25일 동안에 총 12차례가 열려 당시 재판을 받은 민간인 수가 871명에 달했다. 또 군법회의의 경우 1949년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15일 동안에 총 10차례가 열려 당시 재판을 받은 민간인 수가 1659명에 달했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1948년 10월 17일 제주도에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 피고인들이 각 군ㆍ경에 체포된 시기와 각 군법회의의 개최 일자,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년 12월 발간 ‘제주4ㆍ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등에 담긴 당시의 정황 등 제반의 사정을 종합해 보더라도, 위와 같이 단기간에 다수의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군법회의에 회부함에 있어 개개인에 대해 예심조사관에 의한 예심조사 및 기소장 등본 송달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어렵다”고 봤다.

또 “제주4ㆍ3사건의 진행 경위 및 당시의 상황에 관한 조사 내용들이 담겨 있는 ‘제주4ㆍ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재심대상판결 기재 군법회의와 관련해 ‘군법회의를 담당한 군 당국이 예심과 심리를 했다는 증거가 없어 군법회의 재판절차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그렇다면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공소제기의 절차가 법률의 규정에 위반하여 무효인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2호에 의해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를 모두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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