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더] 대법원은 고(故) 이영구 판사의 1주기(2018.11.18.)를 맞이해 11월 16일부터 12월 28일까지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1층 법원전시관에서 ‘고(故) 이영구 판사 1주기 추모 展’을 개최하기로 했다.

이에 11월 16일 추모전 개막식을 개최했다. 개막식에는 김명수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 관계자, 이영구 판사의 유족(김종숙 여사와 자녀) 및 친지, 고인과 인연이 있는 최광률 전 헌법재판관, 김문희 전 헌법재판관, 양삼승 변호사(법무법인 화우 고문), 김목민 변호사, 김기천 변호사, 조홍은 변호사, 심훈종 변호사, 노승두 변호사, 이원구 변호사 등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법원은 “고(故) 이영구 판사는 서울민형사지법 영등포지원 부장판사로 근무하던 1976년 교내 시위를 주도해 기소된 대학생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해 석방하고, 또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고등학생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등 유신정권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양심과 소신에 따라 판결했다고 평가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같이 사법정의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 9월 13일 대법원에 열린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 받았다.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사진=대법원)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사진=대법원)

개막식에서는 고 이영구 판사의 약력을 소개하고, 이어 김명수 대법원장이 추모의 말씀을, 유족 대표인 고인의 차남 이희주 변호사가 인사말씀을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저서인 ‘권력, 정의, 판사’에서 고 이영구 판사의 긴급조치 위반 무죄판결에 대해 ‘시대의 어려움을 딛고 정의를 말하였다’고 논평한 양삼승 변호사가 추모의 말씀을 했다.

◆ 고(故) 이영구 판사의 긴급조치 무죄판결

이영구 판사는 1933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1957년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인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1962년 청주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이후 전주지법 판사,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대전지법 부장판사, 1974년에는 서울민형사지방법워너 영등포지원 부장판사를 재직했다. 1977년 전주지법 부장판사로 전보 후 퇴임했다.

1979년 동아그룹 상임법률고문, 1988년 광우대학교 이사장, 1995년 헌법재판소 헌법소원 국선대리인, 2000년 한복합동법률사무소, 2009년 변호사 이영구 법률사무소로 활동하다가 2017년 11월 18일 별세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주로 민사재판을 담당하던 고인은 유신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76년 서울지방법원 영등포지원 부장판사로 일하며 형사재판을 담당하게 됐는데, 당시 영등포지원은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를 하던 서울대생들의 재판이 많은 곳이었다.

이영구 판사는 1976년 여름 독재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대생 김상진씨의 49재에 맞춰 서울대생들이 교내 시위를 벌인 ‘5ㆍ22 사건’의 주역들 중 2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석방했다.

이 판결은 당시 정권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매우 관대한 판결이어서, “서울대가 최전방이고 영등포 형사재판장이 최고사령부인데 이 판결로 정권의 방어체제가 무너졌다”고 난리가 났으나, 이영구 판사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1976년 11월 수업 도중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비판한 혐의로 기소된 서문여고 교사에 대해서도 “1인 정권은 집권자의 정치활동에 있어서 반복돼 왔고 또 향후 반복 가능한 과거 내지는 장래의 역사적 사실이므로 그 자체가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그 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판결을 선고받은 221명 중 유일한 무죄판결이었다.

대법원에 따르면 이영구 판사가 서울대생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주자 정권은 당시 대법원장에게 이영구 판사를 좌천시키라고 압력을 가했고, 서문여고 교사에 대한 긴급조치 9호 위반 무죄판결 이후에는 그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고 한다.

이영구 판사는 무죄 판결 후 2개월이 채 안 된 1977년 1월 4일 인사 관행을 깨고 전주지방법원으로 전보돼 사실상 좌천됐으나,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곧바로 사표를 내지 않고 일단 전주지방법원에 부임했다가 한 달 후 사직하고 법복을 벗었다.

이영구 판사가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대법원장의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당시 대법원장은 위로의 말과 함께 차 한 잔을 대접하면서 “당신 같은 판사가 사법부에 세 사람만 있었으면, 내가 대법원장 하기에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대법원은 전했다.

대법원은 “검찰과 정보기관의 재판에 대한 노골적 압박이 당연시되던 시절, 이영구 판사는 모든 압박을 물리치고 오로지 헌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선고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어렵고 힘든 무죄판결을 선고한 날 이영구 판사의 아내인 김종숙 여사는 앞날에 대한 걱정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오히려 이영구 판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함을 유지했다고 전해졌다.

훗날 이영구 판사가 보여준 소신과 용기에 대한 언론과 법조계의 찬사가 이어졌으나,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법의 근본이 국민감정에 있다는 점에서 당시 판결은 명확했다. 당시 긴급조치가 잘못됐다는 국민의 법 감정을 고려, 판결에 반영한 것일 뿐”이라며, 오히려 “지금도 그때 실형을 선고한 학생들에게는 미안하다”라고 말했고, 그는 또한 후배 법관들에게 시세를 의식하지 말고 올바른 법을 잘 적용해 법 이상을 실현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 사법부 독립에 대한 이영구 판사의 기고문

대법원에 따르면 이영구 판사는 억울하게 법원을 떠난 후에도 사법부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사법부에 대한 고언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1980년 2월 18일 어느 신문 기고문에서 이영구 판사는 “사법권의 독립을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는 법관 개개인의 문제인 것이다. 개개의 사건에서 그것을 지켰느냐는 법관 자신의 구차스런 변명이 아니라 국민의 혜안이 더 정확하게 판단하여 왔다. 그것이 지켜지지 아니했다면 제아무리 미사여구와 그럴싸한 논리를 판결문에서 전개했던들 국민은 재판을 신뢰하거나 승복하지 않는다. 그런 사건의 경우 담당 판사 한 사람의 양어깨에 사법부 전체의 생사가 걸려 있는 것이다. 사법권의 독립이 결코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가 돼서는 아니 된다. 그것을 갈아먹는 쥐새끼는 어디에 있는가? 외부의 압력과 침해로부터 그것을 보위하여야 할 사명과 임무는 사법행정책임자들에게 있다. 과거를 돌이켜보건대 그들 중 많지 않은 분들이 턱거리(남에게 무턱대고 억지로 떼를 쓸 핑계를 의미)와 안락의자의 수평유지에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불태워 소극적으로 그 사명과 임무를 포기한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減壽(감수, 수명이 준다)를 甘受(감수)해온 가련하고 불쌍한 자여 그대 이름은.... 과거는 물론 장래에 있어서도 사법부의 적은 흔노우지(일본 전국시대 ‘혼노지의 변’에서 유래한 말로, 적은 내부에 있다는 의미)에 있기 마련이다”라고 했다.

◆ 변호사로서 뛰어난 변론능력

대법원에 따르면 이영구 판사는 법복을 벗은 뒤 오랫동안 한 기업체의 상임고문으로 일하다가

퇴직한 후 예순이 넘은 나이에 변호사로 개업했는데, 어느 전 대법관은 2014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81세의 이영구 변호사를 본인이 경험한 최고의 변호인으로 꼽았다.

사건의 맥락과 배경, 의뢰인의 절실함까지 완벽하게 전달하는 열정적인 변호인이라는 이유였는데, 그는 “법조인이 되면 법률 쟁점만 간결하게 말하는 것이 좋은 변론이라고 배운다. 법정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실제 법정에서의 변론은 법리라는 뼈대만 앙상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영구 변호사의 서면변론서는 사건의 맥락과 법률 쟁점이 잘 정리된 건 기본이고 의뢰인의 안타까운 상황, 사건의 배경 등이 잘 담겨 있었다. 서면변론으로도 법정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대법원은 전했다.

[로리더 신종철 기자 sky@lawlea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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