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오랜 기간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일본의 강요에 의한 1876년 개항 이후의 일. 급격한 혼란 속에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에서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직접 통치를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청나라 자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1894년 동학혁명봉기 당시 조정의 진압 요청을 받아 청나라 군대가 더 들어오자 일본은 조약에 따라 같이 출병한다는 명목으로 청일전쟁을 벌여 이겼다. 그 후 일본은 이전의 청나라에 대신하여
민사, 형사 소송 사건에서 상대방이 가진 증거를 강제로 탐지할 수 있는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 재판 과정에서 법률전문가가 아닌 일반 국민이 참여하여 결정하는 ‘배심 제도’ 같이 미국법이 채용하는 방식을 도입하자는 논의가 있을 때마다 단골로 제기되는 반론이 있다. 우리는 미국과 법체계를 달리하니 도입에 신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근대화와 진보를 믿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단순히 틀렸다. 미국인들이 나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도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사용
자본주의는 평등에 대한 약속을, 사회주의는 자유에 대한 약속을 기반으로 존립한다. 경영학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피터 드러커가 했다는 이 말을 필자는 최근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적 소유권에 기한 분권화된 의사결정에 의하여 생산과 분배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에서 평등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것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경제계획을 따르라고 하는 사회주의에서 자유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우선 사회주의의 약속을 보자. 자유의 기반은 물질에 있다. 사회주의는
코인 빚까지 탕감해 주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부채 탕감 조치 발표는 진부한 것이었다.그것이 실제로 적용되는 정도는 이전 정부가 취한 조치에 비해, 또 법원이 사법절차인 파산, 개인회생 절차로 이미 일상적으로 적용하는 정도에 비해 더 나아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정책에 대하여는 도덕 타락을 야기한다는 상투적인 비판이 있었다. 갚겠다는 서약을 하고 빌려 간 돈을 갚지 않게 해 주다니 법감정에 어긋나고, 자기책임의 법원칙을 무시한다는 것이다.금융산업의 홍보전단을 그대로 옮겨 적는 기자들이 ‘도덕적
지난 세기에 민법을 배운 우리들은 19세기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는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로 인하여 그 유용성에 한계를 노출하였으므로, 그 폐단을 보완한 수정자본주의 내지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운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변을 교과서 언저리에서 자주 보았다. 법률 책에서 표현되는 바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상부구조인 민사법의 3대원칙 즉 생산수단의 사유, 자유로운 계약 및 과실책임의 원칙은 수정이 되어, 절대적 소유권의 보호 대신에 상대적 소유권을 수용하여야 하고 계약자유 대신에 계약의
검수완박이라는 말이 한 동안 유행하였다. 요지는 검찰로부터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수사권은 어디로 가나? 물론 경찰에 간다. 야당이 반대하였고, 검찰이 반대하였다. 특정 정파에 줄 서지도 않는 변호사협회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탈당과 같은 약간의 입법과정에서 기술적인 무리를 거쳐 결국 다수결로 통과하였다. 범죄 수사구조의 밑그림을 전적으로 새로 쓰는 파천황적인 개혁이었다.현재의 국회 의석 구조를 보면 과거로 돌아갈 것 같지도 않다. 일부에서는 헌법에 위반한
2022년 6월 9일. 잊어버리기 힘든 날이다. 안 되는 소송을 여러 건 제기한 자는 패소 확정에 앙심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방 소송대리인 변호사 사무실에 침입하였다. 흉기를 휘둘러 두 사람을 찔렀고, 불을 질렀다. 건물 전체가 열과 연기로 피해를 입었다. 해당 사무실에서는 다른 변호사와 사무직원 모두 6명이 돌아가셨다. 피어 보지도 못하고 져 버린 꽃이 되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이종엽 대한변호사협회장을 따라 부협회장인 필자도 빈소에 다녀왔다. 한동훈 법무부장관도